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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2017년 9월 11일 - 다시 가야는 임나가 아니다 등록일 2017.09.27 22:10
글쓴이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조회 2164
-‘가야가 임나’라는 생각들

얼마 전 한 강연에서 한 청년이 “가야가 임나인 줄 알았더니 아니냐?”고 물었다. 당연히 아니라고 답변했다. ‘가야=임나설’은 『삼국사기』·『삼국유사』의 가야가 『일본서기』의 임나와 같은 나라라는 주장이다. 일찍이 『삼국사기』의 사료적 가치에 대해서 불신하면서 ‘가야=임나설’을 주장한 나카 미치요(那珂通世:1851~1908)가 적극 퍼뜨린 논리다. 그는 1896년 「가라고」에서 ‘가야=임나’를 주장했는데, 이것은 메이지〔明治〕 때 일본군 참모본부가 한국점령의 정당성의 근거로 퍼뜨린 정한론(征韓論)의 핵심논리였다. 가야가 임나였으니 일본이 한국을 점령하는 것은 침략이 아니라 과거사의 복원이란 주장이다. 이 논리는 1945년 일제 패망 후에 급속히 무너져가다가 조선사편수회에 근무하던 스에마쓰 야스카즈가 1949년 『임나흥망사』에서 ‘임나=가라’라면서 그 강역을 경상도~전라도까지 확대시키면서 되살아났다. 그후 1990년 초반 경 한일고고학자들에게 다시 무너졌다가 이후 일본 극우파들이 한국 유학생·학자·언론인들에게 장학금과 생활비까지 대주면서 전파한 결과 한국 내에 ‘가야=임나설’이 대폭 늘었다. 일본 극우파는 한국 학자들이 주장하는데 우리가 왜 폐기하느냐는 식으로 교과서에서도 대폭 살려놨다.

-가야가 임나가 아니라는 증거들

나는 강연에서 몇 가지 근거를 들어서 ‘가야=임나설’을 반박했다. 첫째, 가야와 임나는 건국연대가 다르다. 『일본서기』에 임나는 서기 전 33년에 처음 등장한다. 『삼국유사』 「가락국기」는 가야가 서기 42년에 건국했다고 말한다. 임나와 가야는 출생 연도가 최소한 75년 이상의 차이가 난다. 출생 연도가 다른 두 사람을 같은 사람이라고 주장할 수 없는 것은 두말 할 것도 없다.

-369년에 가야에는 아무 일도 없었다.

둘째, 식민사학자들의 주장과 달리 369년에 가야는 멸망하지 않았다. 식민사학자들은 서기 369년에 가야를 점령하고 임나를 설치했다고 주장한다. 임나가 경상도뿐만 아니라 전라도까지 지배했다고 주장하는 김현구 씨는 이렇게 말한다.
“『일본서기』에 기록된 한반도 남부경영의 주요 내용은 모두 369년 목라근자의 소위 ‘가야 7국 평정’ 내용을 전제로 해서만 그 사실이 성립될 수 있다(김현구, 『임나일본부설은 허구인가』, 55쪽)」
369년에 가야가 점령당했다는 이 주장은 김현구 씨뿐만 아니라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가야=임나설’을 주장하는 한일의 모든 학자들이 공통으로 받아들이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 주장이 맞으려면 가야왕조는 369년에 멸망했어야 한다. 그러나 『삼국유사』는 가야의 제5대 이시품왕이 346~407까지 재위에 있다가 아들 좌지왕(재위 407~421)에게 왕위를 물려주었고, 제6대 좌지왕은 아들 취희왕(재위 421~451)에게 7대 왕위를 물려주었다고 말하고 있다. 369년에 가야 왕실은 아무 변동이 없었다. 즉, 369년에 가야 왕통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야마토왜가 가야를 점령해서 임나를 설치한 사실 따위는 없었다.

-멸망한 해도 다르다

가야와 임나의 출생 연도가 다르다는 사실은 앞에서 봤다. 그럼 사망연도, 즉 멸망한 해는 어떨까? 『삼국사기』는 금관가야는 법흥왕 19년(532)에, 대가야는 진흥왕 23년(562)에 멸망했다고 말한다. 이후 『삼국사기』·『삼국유사』에는 더 이상 가야에 관한 기사가 등장하지 않는다. 만약 이 가야가 『일본서기』의 임나라면 562년 이후에는 『일본서기』에도 임나가 등장하면 안 된다. 그러나 『일본서기』는 83년 뒤인 645년에도 임나가 존속하는 것으로 나온다. 출생연도가 최소한 75년 이상의 차이가 나고 사망년도도 최소한 83년 차이가 나는데 같은 나라라고 볼 수가 없다. 일본 극우파나 그 추종자들의 주장은 조금만 살펴보면 이렇게 진위가 명백해진다.

-그 외의 증거들

그 외에도 가야가 임나가 아니라는 증거는 많다. 왕의 이름도 다르다. 『일본서기』 「계체(繼體) 23년(529)조는 임나왕(任那王)의 이름을 기능말다(己能末多)라면서 기능말다는 아리사등(阿利斯等)이라고도 말했다. 한 사람이 두 이름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임나가 가야면 서기 529년에 가야왕의 이름도 기능말다 또는 아리사등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삼국사기』·『삼국유사』는 529년의 가야 임금을 제10대 구형왕(仇衡王:재위 521∽532)라고 달리 말하고 있다. 그가 바로 532년 신라에 항복한 금관 가야의 마지막 임금 김구해(金仇亥)로서 김유신의 증조부이다.

-임나는 어디에 있었는가?

‘가야=임나설’을 주장하는 식민사학자들은 임나의 위치를 가야라고 본다. 일제강점기 초기에는 쓰다 소키치가 경상도 김해일대에 있었다고 본 것처럼 김해일대라고 주장하다가 스에마쓰 야스카즈가 1949년에 ‘경상도~전라도’까지 확장시켰다. 고려대 명예교수 김현구 씨는 ‘위치 비정은 스에마쓰설을 따랐다’라면서 임나 강역을 경상도~전라도까지 늘려놨다. 이 임나는 백제가 지배했지만 그 백제는 야마토왜의 식민지라는 3단논법으로 임나뿐만 아니라 백제까지 야마토왜의 식민지로 둔갑시켰다. 
반면 우리의 시각으로 한일고대사를 보는 남북한의 모든 학자는 임나의 위치를 일본 열도 내로 본다. 남한의 민족사학자들은 ‘대마도설(최재석·문정창·이병선·황순종)’, ‘큐슈설(김인배·김문배)’ 등으로 나뉘는 반면 북한 학계는 오카야마(岡山)현 키비(吉備)지역이라고 본다. 우리 눈으로, 그리고 사료를 바탕으로 한일고대사를 보는 모든 학자들은 남북을 막론하고 임나가 일본열도에 있었다고 보는 반면 일본 극우파의 눈으로 한일고대사를 보는 모든 학자들은 그 형식상 국적이 일본인지 한국인지를 막론하고 경상도 및 전라도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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