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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2017년 8월 16일 - 이상룡과 임청각 등록일 2017.09.27 21:48
글쓴이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조회 2155
-압록강을 건너며

지난 2월 나는 이곳 페북에 ‘예언자적 지식인 석주 이상룡’이란 제목의 글 한 편을 올렸다. 일제가 나라를 강탈한 이듬해인 1911년 1월 5일, 「서사록(西徙錄)」이란 망명일기를 쓰며 안동에서 만주 유하현 횡도촌으로 망명해 독립운동을 전개했던 석주 이상룡의 이야기였다. 2월 27일 ‘강을 건너다〔渡江〕란’ 시를 읊으며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는데, 이 시는 어려운 일을 겪을 때마다 내게 힘을 주었던 시이기에 다시 한 번 읊조려본다.
칼날보다 날카로운 삭풍이/차갑게 내 살을 도려내네…
이 머리는 차라리 자를 수 있지만/이 무릎을 꿇어 종이 될 수는 없도다…
누구를 위해 머뭇거릴 것인가/호연히 나는 가리라.
압록강을 건넌 이상룡 일가는 유하현 횡도촌에서 비슷한 경로를 거쳐 도착한 서울의 우당 이회영 6형제 일가, 강화도와 충청도 진천 등지에서 망명한 양명학자들과 서로 조우한다.

-신흥무관학교의 국사교육

이역만리 타향에서 다시 만난 이들은 곧 눈물을 거두고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한다. 1911년 4월 노천 군중대회를 열어서 한인 자치조직인 경학사(經學社)를 만들고, 신흥무관학교를 만든다. 나는 『이회영과 젊은 그들』에서 신흥무관학교에서 실시한 국사교육에 대해서 이런 글을 썼다.
「(신흥무관학교는)또한 국사교육을 철저하게 시켰다. 이상룡이 지은 ??대동역사(大東歷史)??가 교재였는데, 만주를 단군의 옛 강역으로 기술한 사서(史書)였다. 석주 이상룡의 「서사록」에는 그의 역사관에 관한 이야기가 다수 나온다. 그는 1911년에 이미 일제가 훗날 조선총독부 산하에 조선사편수회를 만들어 한국사를 왜곡하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듯 식민사학의 논리를 미리 혁파했다. 훗날 조선사편수회의 쓰다 소우키치(津田左右吉)와 그의 한국인 제자들이 만드는 식민사학의 주요 논리 중에 한사군은 한반도 내에 있었다는 것이 있는데 이상룡은 한사군 중 하나인 현도군에 대해 “『만주지지(滿州地誌)』에 ‘현도(玄?)는 사군 중의 하나인데, 지금 평해성 복주(復州) 등지이다’라고 하였다”고 현도군이 만주에 있다고 서술했다.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에 석주 이상룡이 이미 논파한 식민사학의 논리를 현재 한국 주류사학계는 그대로 추종해 한사군이 한반도 내에 있었다고 주장하고 있으니 석주의 유혼(幽魂)이 혀를 찰 것이 분명하다. 석주는 단군조선→부여→고구려→발해로 이어지는 역사인식을 갖고 있었다. 정신적으로는 이런 국사관으로 무장하고, 육체적으로는 군사훈련으로 무장한 독립전사를 배출하는 곳이 신흥무관학교였다(『이회영과 젊은 그들』, 2009년, 87쪽)」
이상룡처럼 1차사료를 근거로 한사군이 한반도에 있지 않았다고 서술하면 ‘사이비, 유사역사학자’로 매도당하는 세상이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다.

-만주 무장투쟁파의 대부

만주 항일무장투쟁파의 대부였던 석주 이상룡은 1925년 잠시 임시정부 국무령을 역임했다. 이상룡은 1932년 5월 12일 사시(巳時:오전 9시~11시), 길림성 서란현 우사(寓舍)에서 향년 75세로 세상을 떠나는데, 임종을 지킨 그의 아들 준형은 이렇게 말한다.
「부군(이상룡)은 (두 동생의) 손을 잡고 위로하고 이어서, “인생은 다할 때가 있는 것이니 무슨 개의할 것이 있겠는가. 다만 피에 맺힌 한을 풀지 못하였으니 장차 어떻게 선조의 영혼에 사죄하겠는가.”라고 말했다(이준형, 「선부군유사」, 『석주유고』 후집)」
이상룡이 말하는 ‘피로 맺힌 한’은 두말할 것도 없이 빼앗긴 나라를 되찾는 것이었다. 그는 “국토를 회복하기 전에는 내 해골을 고국으로 싣고 돌아가서는 안 된다”고 유언하고는 피맺힌 인생을 마쳤다.

-임청각과 일제가 깐 기찻길

일제는 이상룡의 고성 이씨 종가인 임청각 앞에 기찻길을 놓았다. 임청각의 기를 끊는다면서 일부러 기찻길을 우회해 임청각 앞을 끊은 것이다. 우리는 해방 72년이 되도록 임청각의 기를 끊는다면서 일제가 놓은 기찻길 하나를 철거하지 못했다. 일제의 패망으로 광복은 되었지만 세상은 여전히 친일파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작년에 강의차 임청각에 갔다가 복원을 추진하는 분을 만났더니 임청각 앞의 철로 철거 계획이 있다고 하셨다. 아는 ‘일부는 남겨두어서 후세 교육의 자료로 사용해야 한다’고 말씀드렸더니 흔쾌히 동의하셨다. 올해 광복절 축사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임청각 복원을 역설하는 말을 듣고 이제야 나라가 조금은 나라다워지는가 보다는 생각이 들었다.

-독립운동가 재산 찾아줍시다

나와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는 지난 봄 다음의 스토리펀딩에 ‘독립운동가의 재산 찾아줍시다’라는 캠페인을 진행했다. 3·1이란 숫자가 우리 민족의 정신사와 독립운동에 여러 면에서 의미 있기에 3,100만원을 모금액 목표로 삼았다. 독립운동에 직접 쓴 재산이나 일제가 빼앗은 독립운동가들의 피탈재산을 되돌려주는 입법 청원운동을 하자는 사업이었다. 당초 3100만원이란 거금을 모으기 쉽지 않을 것이란 우려가 많았지만 다행히 많은 분들이 기부에 동참해 주어 목표액을 초과달성했다. 캠페인의 일환으로 역사소설가 이기담 선생이 ‘고아원에서 자랐다는 독립운동 후손의 사연’이란 제목으로 석주 이상룡의 증손 이항증 선생 인터뷰를 실었다. 어떻게 사셨느냐는 질문에 ‘독립운동을 하면 삼대가 망한다’는 말과 함께 고아원에서도 자랐던 사연을 말했다. 우리가 살아온 세월이 그랬다.

-비내리는 광화문 광장에서

광복절 전 날 비내리는 광화문광장에서 여성독립운동가들을 기념하는 행사가 있었다. 한 마디 하는 기회에 독립운동가 재산 찾아주기 사업의 당위성에 대해서 역설했다. 연말이 되면 친일파들을 기리는 상은 많다. 상금이 보통 1억원을 훌쩍 넘는다. 반면 독립운동가들을 기리는 상은 없다. 독립운동가 후손들은 대부분 가난하다. 이제는 독립운동가의 재산을 돌려줄 때가 되었다. 그러면 그 재원으로 재단을 만들어서 독립운동가들의 유지를 계승하고 그분들의 애국정신을 오늘에 되살리는 사업을 전개하겠다는 내용이었다. 행사장에 여성 국회의원들이 여러 명 참석했는데 의외로 큰 관심을 보이면서 적극 돕겠다는 뜻을 표했다. 

이제는 이 나라 역사가 제 길을 찾아가고 있는 것인가? 광복절 전날 저녁 세종로공원에서 무장독립전쟁에 대한 강의를 했는데 많은 비가 내리는 우중에서도 한 시간 내내 아무도 자리를 뜨지 않고 경청하는 것을 보고 이 나라가 비로소 중심은 잡아간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생각이 다시 배신당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은 평범한 대한민국 국민이면 다 같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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