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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20170614 - 답사 에피소드 등록일 2017.09.19 11:53
글쓴이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조회 1737
20년 이상 답사를 꾸준히 다녔다. 아마도 중국과 사업관계 아닌 사람치고 나만큼 중국, 그것도 오지 답사를 많이 다닌 사람을 찾기도 쉽지는 않을 것이다. 눈으로 본 문헌 사료는 발로 뛰는 답사와 합치될 때 완벽한 사실이 된다. 

세상 모든 일이 그렇듯이 답사에도 ‘답사운’이란 것이 있다. 꽤 유명한 장소도 뜻밖에 찾지 못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전혀 알려지지 않은 장소도 뜻밖에 쉽게 찾는 경우가 있다. 나는 후자에 속한다. 지금까지 목표로 삼은 유적을 찾지 못한 적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그 중에는 뜻밖의 도움을 받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답사팀은 이를 선조들이 음양으로 보우(保佑)하시는 덕분으로 생각한다. 낙랑군 조선현 답사 때의 일이다. 조선총독부 및 그 후예 식민사학자들은 낙랑군 조선현이 대동강 남쪽 대동면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청나라의 역사지리학자 고조우(顧祖禹)는 『독사방여기요(讀史方輿紀要)』에서 명·청시대 영평부(永平府), 즉 지금의 하북성 노룡현 일대에 낙랑군 조선현이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또 조선성이 있는데, 영평부 북쪽 40리에 있다. 한나라 낙랑군 속현이다(又朝鮮城,在府北四十里,漢樂浪郡屬縣也:『독사방여기요』 권17)”
한나라 낙랑군 조선현(성)이 노룡현 북쪽 40리에 있다는 것이다. 노룡현에는 사마천이 『사기』 열전 중에 가장 첫머리에 수록한 백이·숙제 묘가 있고, 우물이 있다. 조선의 유학자들이 대단히 좋아했던 충절의 선비들인데, 동이족 고죽국(孤竹國) 사람들이다. 백이·숙제 묘와 우물은 쉽게 찾았지만 너무 황폐했다. 조선 선비들이 봤다면 충절의 선비들을 이렇게 대접하느냐고 크게 꾸짖었을 것이다.

문제는 노룡현 북쪽 조선현을 어떻게 찾느냐는 것이다. 몇 사람에게 물었으나 아는 사람이 없다. 안경 낀 대학생에게 물으니 뜻밖에 자신의 부친이 그 마을 출신이라면서 집안으로 들어가 아버지를 모시고 나왔다. 설명을 듣던 부친은 안내를 부탁하자 선뜻 버스에 올라탔다. 북쪽으로 한참을 달려가니 옛 마을이 나왔다. 갑자기 나타난 우리 일행에 마을 사람들이 몰려나와 구경했다. 마을은 물론 집집마다 모두 깨끗해서 지금까지 숱하게 다녔던 다른 마을과는 달랐다. 몽골에 갔을 때 게르 안이 너무 깨끗해서 놀랐던 것과 같은 느낌이었다. 

그 부친은 우리 일행을 옛날 우물이 있는 장소로 안내했다. 고정(古井)이라고 쓰여 있는 우물은 지금은 사용하지 않고 있었다. 일행 중 한 명인 S대 김교수가 마을 사람의 자전거 오토바이를 장난삼아 빌려 탔다. 나는 속으로 ‘비용을 꽤 줘야할텐데…’라고 생각했다. 중국에서는 공짜가 없다. 때로는 길을 가르쳐주고도 돈을 받는다. 그런데 놀랍게도 자전거 오토바이 주인은 돈을 사양했다. 숱한 답사 중에 아주 드물게 보는 광경이었다. 그 부친도 마찬가지였다. 왕복 2시간 이상을 우리를 위해서 시간을 할애했으니 중국이 아니라 전 세계 어느 곳이라도 대가를 지불해야 했다. 그런데 그 부친은 우리가 사례라도 할까봐 도망가듯이 빠른 발걸음으로 다시 집으로 향했다. 사진작가인 고 권태균 선생이 뛰어가 한국산 담배 한 갑을 드렸다. 부친은 이것도 극구 사양하다가 마지못해 받았다. 

그날 저녁 식사에서 우리는 반주를 곁들여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부친의 도움이 없었다면 낙랑군 조선현을 찾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 대학생과 부친을 만난 것은 우연이었을까? 물론 나는 선조들의 도움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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