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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2017년 6월 17일 - 위만조선의 수도 왕검성이 평양? 등록일 2017.09.27 18:50
글쓴이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조회 1475
공부가 직업인 내 견지에서 볼 때 지금 한국사회의 가장 큰 문제점은 지식의 하향평준화다. 그 주범은 당연히 공부하지 않는 대학교수들이고 내 경우로 특정하라면 그중에서도 고대사 전공교수들이다. 『낙랑군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는 이화여대 오모 교수의 다음 글을 보자.

“위만조선이 멸망할 당시 수도는 왕검성임이 분명하며, 그 자리에 낙랑군 조선현이 설치되었으므로, 평양 일대에서 발굴 조사된 낙랑군 관련 유적으로 통해 볼 때, ‘왕검성=낙랑군 조선현=평양’이 자연스럽게 인정된다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입론이 평양설이나 이동설의 근간이 되는 것이다(오○○, 한국고대사학회, 『한국고대사 연구의 새 동향』, 서경문화사, 2007)
오교수는 위만조선 수도 왕검성이 낙랑군 조선현이 되었고, 이곳이 평양이라고 주장했다. 여기에서 ‘이동설’이 나왔다고 했으니 ‘왕검성=낙랑군 조선현=평양’이 깨지면 이른바 ‘이동설’도 깨지는 것이다. 

한사군의 위치에 대한 1차 사료는 『한서(漢書)』 「지리지」다. 『한서』 「지리지」는 ‘요동군 험독현’에 대해서 응소(應劭)가, “조선왕 위만의 도읍이다.”라고 말했다는 주석을 붙였다. 위만 조선의 수도 왕검성에 들어선 것은 낙랑군 조선현이 아니라 요동군 험독현이라는 것이다. 응소는 2세기 후반경의 학자이다. 이른바 강단사학계는 서기 313년까지 ‘왕검성=낙랑군 조선현=평양’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니 둘 중의 한 명은 틀린 것이다. 누가 틀렸을까? 당연히 강단사학계가 틀렸다. 
낙랑군과 요동군이 존재하고 있던 시기에 살았던 2세기 후반의 학자가 ‘왕검성=요동군 험독현’이라고 말하는 것을 못 본 체하고, ‘왕검성=낙랑군=평양’이라고 우기는 것인데, 다른 나라 같으면 학부 레포트 수준도 되지못할 이런 수준 가지고 박사학위를 받고, 대학교수가 되어 이 따위 허황된 이야기를 ‘통설, 정설’로 성역화하고는 이에 대한 문제제기를 ‘사이비, 유사’ 따위의 비학문적 말로 매도하는 것이다. 그러면 역시 공부하지 않는 기자들과 끼리끼리 카르텔을 이루어 1차사료에 입각한 문제제기를 ‘사이비, 유사’ 운운하며 학자 죽이기 가세하는 것이다. 

더욱 심각한 것은 그 논리의 뿌리가 조선총독부라는 점이다. 북경 유리창가를 돌아다니면서 한나라 및 낙랑군 유물을 미친 듯이 사들여 조선총독부로 보냈던 세키노 타다시(關野貞)가 『조선고적도보(古蹟圖譜)』에서 “평안남도 대동군 대동강면의 토성동(土城洞)은……아마도 낙랑군치(樂浪郡治:낙랑군 조선현)의 유적일 것이다”라고 말한 것을 교시처럼 떠받드는 것이다. 
더욱 웃기는 것은 중화사상의 중국학자들은 비록 동북공정을 수행하지만 세키노 타다시의 주장을 한마디로 일축한다는 점이다. 위만조선의 도읍지에는 선 것이 ‘요동군 험독현’이므로 최소한 지금의 요동반도에 있어야지 평양에 있을 수는 없다는 학자적 자존심이다. 그래서 동북공정의 이론서 역할을 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