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세기의 고구려 무덤
북한의 조선중앙통신은 2017년 9월 20일 평양시 낙랑구역 보성리에서 고구려 벽화무덤을 새로 발견했다고 보도했다. 평양의 ‘낙랑구역’은 한사군의 낙랑군이 아니라 최씨가 국왕으로 있던 낙랑국 지역을 뜻한다. 북한의 발표에 따르면 길이 300cm, 너비 268cm, 높이 184cm로 이 부부 무덤은 돌로 무덤칸을 조성하고 동·서·북쪽의 벽에 검은 색 안료로 벽화를 그렸다. 동쪽 벽에는 3열로 구성된 고구려 개마무사 벽화가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조성 시기다. 조선중앙통신은 무덤의 구조와 벽화의 내용, 출토 유물 등으로 보아 3세기 전반기에 축조된 것으로 본다고 밝혔다.
-‘평양=낙랑군설’은 논증이 끝났다?
남한 식민사학의 도그마에 따르면 3세기 전반에 평양에서 고구려 지배층의 무덤이 나오면 안 된다. 313년까지 중국 한(漢)나라의 식민지인 낙랑군이 지배하고 있었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올해 현충일 하루 전인 6월 5일 『한국일보』의 식민사학 카르텔 기자 조태성은 『조선일보』에서 이른바 이른바 “무서운 아이들”이란 닉네임을 붙여준 기경량(39), 안정준(38) 등의 대담을 대서특필했는데, 그 중 한 대목을 다시 보자. 「-(동북아역사)지도 사업에서 논란이 됐던 낙랑군 위치 문제는 어떻게 보나. 안(정준)=“낙랑군이 평양에 있다는 건 우리뿐 아니라 제대로 된 학자는 모두 동의한다. 100년 전에 이미 논증이 다 끝났다. 바뀔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보면 된다.” 김(재원)=“100년 전이라 하니까 자꾸 ‘친일 사학’ 소리 듣는다. 하하.” 기(경량)=“그러면 200년 전 조선 실학자들이 논증을 끝냈다라고 하자.”(『한국일보』, 2017년 6월 5일)」 조선총독부 역사관 수호에 목숨 건 조태성이나 무서운 아이들의 ‘낙랑군이 평양에 있다는 건 논증이 끝났다’는 깔깔거림을 무색하게 만들면서 3세기 초반의 고구려 벽화 무덤이 평양에서 발견된 것이다.
-313년에 하북성에 이치되었다는 주장
원래 조선총독부는 고조선은 평안남도 일대에 있던 작은 소국으로 시작해 소국으로 끝났다, 낙랑군은 평양에 있었다고 주장했다. 해방 후 남한 식민사학도 조선총독부의 교시를 따라 ‘평양=낙랑군설’을 하나뿐인 교리로 추종해왔다. 그런데 한·중 수교 후 하북성 일대에서 비파형 동검 같은 고조선 유물이 쏟아져나온다는 사실이 널리 알려졌다. 그러자 평양에 있던 낙랑군이 313년 요서지역으로 이주했다는 교치(僑置) 또는 이치(移置)설을 내세웠다. ‘교치·이치’란 한마디로 평양의 낙랑군이 313년에 지금의 요서지역으로 이사했다는 주장이다.
-조선총독부가 만든 『조선반도사』
식민사학이 새로운 주장을 펼칠 때 그 근거를 알려면 조선총독부를 주목하면 된다. 313년 낙랑군이 지금의 요서지역으로 ‘교치·이치’했다는 주장을 가장 먼저 펼친 것은 조선총독부에서 만든 『조선반도사』다. 일제는 한국 강점 직후 중추원 산하에 ‘조선반도사 편찬위원회’를 만들어 『조선반도사』를 편찬했다. 한국사의 강역에서 ‘대륙’과 ‘해양’을 잘라 반도로 가두고 그 반도의 북쪽에는 한사군이란 중국 식민지가 있었고, 남쪽에는 임나일본부라는 일본의 식민지가 있었다는 것이 『조선반도사』의 핵심주장이었다. 『조선반도사』의 고대 편을 서술한 인물이 남한 식민사학의 교주인 이마니시 류(今西龍)인데, 그가 바로 313년에 장통(張統)이란 인물이 고구려 미천왕과 싸우다가 패해서 1천 가구를 거느리고 모용외에게 가서 귀부하니 모용외가 낙랑군을 설치해 주었다는 ‘교치·이치설’을 발명해냈다.
-교치설은 SF소설
이 ‘교치설’에 대해서는 몇 번이나 반박했으니 다시 반박하지는 않겠다. 다만 장통은 고구려와 싸우다가 패배해서 민간인 포함한 1천가구를 데리고 도망가는 길인데, 북쪽의 고구려 강역 수천리를 뚫고 모용외에게 간다는 것은 SF소설에서나 있을 수 있는 일이라는 점만 다시 지적하겠다. 낙랑군은 처음부터 평양에 존재하지 않았다는 수많은 자료들이 나왔지만 그때마다 남한 식민사학은 미꾸라지처럼 요리조리 빠져나갔다. 이제 마지막 남은 물 웅덩이가 313년 ‘교치설’과 고고학인데 이 두 가지 웅덩이가 이번 3세기 초반 고구려 벽화 발견으로 바짝 말라버린 셈이다. 이들은 분명 “북한의 발표를 못 믿겠다”, “3세기 초반의 고구려 무덤이라고 볼 수 없다”는 말장난으로 빠져나가려고 시도할 것이다.
-갱단사학의 유물 해석사전
갱단사학의 유물해석 사전이 있다. 몇 가지 원칙을 대면 이런 것이다. ①일제강점기 일본인 식민사학자들이 발견한 것은 검증과정 생략하고 무조건 신봉한다. 1914년 평남 용강군 해운면에서 발견되었다는 이른바 ‘점제현 신사비’는 무조건 진짜다. 왜냐? 남한 식민사학의 교주 이마니시 류 선생님이 발견했기 때문이다. 2천 년 전에 세운 신사비 바닥에 시멘트가 묻어 있었다는 북한 측의 발표도 소용없다. 가는 곳마다 한나라, 낙랑 유적·유물을 발견한 세키노 타다시 선생님의 초과학적인 발굴결과도 무조건 다 믿는다. 세키노 타다시가 북경의 골동품 상가인 유리창가에서 ‘한대, 낙랑 유물’을 마구 사들여서 총독부로 보냈다는 일기가 공개되었어도 소용없다. ②한국사에 유리한 유적·유물이 나오면 일제히 ‘묵언수행’에 돌입한다. 1977년 요녕성 서쪽 끝인 금서(錦西)지역에서 ‘임둔태수장’이란 봉니가 발견되었다. 평양에서 발견된 봉니들에는 늘 조작시비가 붙는데, 조작시비가 붙지 않는 최초의 봉니발견이다. 남한 갱단사학은 일제히 ‘묵언수행’에 들어갔다. 그간 임둔군이 함경남도와 강원도에 있었다는 조선총독부의 교리를 신봉해 왔는데, 이 교리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복기대 교수가 논문으로, 또 내가 『한국사 그들이 숨긴 진실』에서 이 사실을 알렸을 뿐이다. ③북한에서 출토된 유적·유물은 한국사에 불리할 경우만 신봉하고, 나머지는 부인하거나 180도 거꾸로 주장한다. 2005년 북한에서 이른바 ‘낙랑목간’이란 것을 발굴했다고 발표했다. 그간 점제현 신사비가 일제의 조작이라는 북한의 발표는 무조건 믿을 수 없다고 부인하던 남한 식민사학은 일제히 주사파로 전향해 ‘낙랑=평양설’이 사실이라며 칭송하기 바빴다. 낙랑목간은 ‘낙랑군 초원(初元) 4년 현별(縣別) 호구부’인데, 문성재 박사는 여기 쓰인 ‘별(別)자’는 메이지 시대 일본에서 쓰던 일본식 한자라는 사실을 밝혀 냈다. 중국이나 우리나라는 속현(屬縣) 등으로 쓰지 별(別)자를 쓰지 않는다는 것이다. 일제가 파 묻어 놓고 써먹으려고 하다가 미처 써먹기 전에 쫓겨간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아무리 학문적 설명이 나와도 소용없다. 북한에서는 해방 후 2700기 이상의 무덤을 발굴한 결과 한사군 무덤은 하나도 없었다고 발표했는데, ‘무서운 아이’ 안정준은 북한에서 수많은 무덤을 발굴한 결과 ‘낙랑=평양설’을 입증했다고 거짓말 시켰다.
-대한민국의 슬픈 자화상
이번 3세기 고구려 고분 벽화의 발견은 당연한 결과이다. 앞으로 더 많은 유적·유물들이 나올 것이다. 낙랑군이 지금의 하북성 일대에 있었다는 중국 고대 문헌사료는 많다. 앞으로도 더 많은 문헌사료가 발견될 것이다. 낙랑군이 지금의 평양에 있었다는 문헌사료는 없고, 유적·유물도 일본인들의 때가 탄 것 외에는 없다. 낙랑군은 평양에 있지 않았다. 그러나 남한 식민사학계에 ‘낙랑군=평양설’은 학문 이론 중의 하나가 아니라 무조건 믿고 신봉해야 할 교리다. 그래서 그들은 점차 고립되어 간다. 일제가 쫓겨 간 지 72년이 넘었는데도 조선총독부교를 신봉하는 그들이 불쌍하다. 그러나 역사학계는 아직도 그들이 장악하고 있는 것이 대한민국의 슬픈 자화상이다. 이 자화상 속에 우리가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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