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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2017년 9월 25일 - 초대부통령 이시영 선생의 역사관(3) 등록일 2017.09.27 22:19
글쓴이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조회 682

-훈민정음 이전의 고유 문자 이야기-

-우리 고유의 문자가 있었다.
지금 우리는 「훈민정음(訓民正音)」을 우리 최초의 문자라고 보고 있거나 혹은 삼국 때 사용했던 이두(吏讀)를 우리 역사상 최초의 문자라고 보고 있다. 그런데 초대 부통령 이시영 선생은 『감시만어』에서 그 훨씬 이전에 우리 고유의 문자가 있었다고 말했다. 성재는 “우리 한국은 나라를 향유한지 4천여년이고, 삼한시대 이후부터는 신빙성 있는 역사가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고 말하고는 수많은 역사서와 경적(經籍), 그리고 고유한 문자 등이 있었는데, 네 번에 걸친 외국의 침략과 한 번의 내란으로 대부분 불타거나 사라졌다는 것이다. 첫 번째는 연(燕)나라 노관이 난을 일으키면서 위만이 들어와 ‘기자조선’의 역사기록이 모두 불탄 것이며, 두 번째는 당나라의 침략이고, 세 번째는 후백제 견훤이 신라의 구사(舊史:옛 역사서)와 경적을 불태운 것이며, 네 번째는 몽골의 침략이며 다섯 번째는 일제의 침략이다.

-『신지비사』와 「구변진단도」

성재는 우리나라의 가장 오래된 문예품이 단군시대 글을 관장하던 신지(神誌)가 쓴 『비사(秘詞)』라는 것이다. 이시영 선생은 ‘『비사』는 그 글씨의 모양이 기이하고 의미가 심오해서 해득하기가 쉽지 않은데, 고구려 대홍영(大弘英)이 한문(漢文)으로 번역하고 서문에 주석을 붙인 것이 「구변진단도(九變震檀圖)」’라고 썼다. 그러면서 “우리 한인(韓人)은 상고시대부터 우리 고유의 문자를 가지고 있었다”라고 확신했다. 그런데 우리 옛 선비들이 어떤 주장을 할 때는 반드시 근거를 가지고 말한다. 고구려 대홍영이 『신지비사』의 내용을 한문으로 번역했다는 「구변진단도」는 고려 말 조선 초기 학자 양촌(陽村) 권근(權近 1352~1409)의 「태조 이성계 신도비명」에도 나오는 책이다. 권근은 고려 서운관(書雲觀:천체 관측을 관장하던 관서)에 예부터 비장해오던 『비기(秘記)』 중에 「구변진단도」가 있었는데, 여기에 “나무를 세워 아들을 얻는다〔建木得子〕” 란 말이 쓰여 있었다는 것이다. 건목득자(建木得子)란 이(李)씨가 나라를 얻는다는 뜻으로 이성계의 조선 건국을 말한다. 성재는 진단(震檀)이란 우리나라를 뜻하고, 9변이란 나라 도읍이 아홉 번 변한다는 뜻이라고 부연 설명하고 있다.

-『신지비사』라는 책

『신지비사』라는 책을 근거로 삼으면 조선총독부 역사관을 추종하는 학자들은 『환단고기』에 나오는 책 이름이라고 거품을 물겠지만 이 책은 『삼국유사』의 「흥법(興法)」조에도 나온다. 『삼국유사』 흥법조의 ‘양명(羊皿)이 개금으로 환생했다’는 대목이 그것인데, 여기에서 일연은 『고려고기(高麗古記)』라는 책을 인용해 재미있는 일화를 적어놓고 있다. 수 양제가 다시 군사를 일으켜 고구려를 공격하던 영양왕 25년(614)에 고구려 왕이 거짓으로 글을 올려 항복을 청했다. 이때 고구려 한 무사가 작은 화살을 품에 감추고 사신을 따라 양제가 탄 배에 올랐다가 양제가 표문을 읽을 때 활을 쏘아 가슴에 맞췄다. 양제가 “내가 천하의 주인으로 작은 나라를 친히 정벌하다가 이기지 못했으니 만대의 웃음거리가 되었구나!”라고 한탄하자 우상(右相) 양명이 “신이 죽어 고구려의 대신이 되어서 반드시 그 나라를 멸망시켜 황제의 원수를 갚겠습니다”라고 맹세했다. 수 양제가 죽은 후 고구려에 환생한 이가 바로 연개소문이라는 것이다. 『고려고기』라는 책은 지금 전해지지 않고 있지만 일연 때만 해도 전해지고 있었던 고구려의 역사서였다.

-역사상의 여러 고문자들

일연은 이외에도 연개소문에 대한 여러 이야기들을 실으면서 「『신지비사』의 서문에는 “소문(蘇文) 대영홍(大英弘)이 서문을 아울러 주석했다”고 했으니 소문(蘇文)이 곧 벼슬의 이름인 것은 문헌으로 증명되지만, 「전기」에는 “문인(文人) 소영홍(蘇英弘)이 서문을 썼다”고 했으니 어느 것이 옳은지 알 수 없다.」라고 덧붙였다. 일연은 연개소문의 ‘소문’은 벼슬의 이름이 맞는데, 지금은 전하지 않는 「전기」에는 ‘문인 소영홍이 서문을 썼다’고 되어 있으니 어느 문헌이 맞는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성재 이시영이 본 문헌에는 ‘고구려 대홍영이 『비사』를 한문(漢文)으로 번역하고 서문에 주석을 붙인 「구변진단도」를 썼다’라고 나와 있었다는 것이다. 성재는 훈민정음 이전에 우리 글자가 있었다는 여러 사례를 들고 있는데, 이를테면 문화 유씨 족보에 쓰여진 왕문(王文)의 서법이 전자(篆字) 같기도 하고 부적(符籍) 같기도 하다는 것이며, 평양 법수교(法首橋)의 고비(古碑)나 남해도 암벽의 글자 등도 모두 고대 한인이 사용하던 고대문자라고 보고 있다.

-국어학자 김윤경도 마찬가지 주장

그런데 훈민정음 이전에 우리 고문자가 있었다는 주장은 성재가 『감시만어』에서 처음 한 것이 아니다. 국어학자 주시경(周時經)의 제자로서 일제강점기 여러 학교에서 국어와 역사를 가르쳤던 한결 김윤경(金允經:1894~1969)도 마찬가지 주장을 했다.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옥고를 치르기도 했던 김윤경은 1931년 경 『동광』에 「정음(正音) 이전의 조선글…」 등 여러 편의 논문을 실어, “훈민정음 이전에 우리 고유문자가 있었다”고 논증했다. 김윤경도 그 근거에 대해서 『문헌비고』, 『용비어천가』 등 여러 문헌을 들었는데, 그중 하나가 조선 초기 권문해의 『대동운부군옥』에 “신지(神誌), 단군 때 사람으로 스스로 선인(仙人)이라고 하였다”라는 내용이다. 그런데 김윤경은 이 글에서 성재 이시영처럼 문화 유씨 족보의 왕문과 평양 법수교, 남해도 암각 문자 등을 인용해 훈민정음 이전에 우리 고유의 문자가 있었다고 주장해서 이런 인식이 당시 독립운동가 겸 역사학자 및 국어학자들 사이에서는 널리 통용되었던 인식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일제가 조선어학회를 탄압한 것이 국어와 역사가 결합한 이런 움직임을 식민지배 통치의 근본적 위협으로 보았기 때문임을 말해준다.

-해방 후 사라진 우리 전통의 사유체계

김윤경은 또한 “일본 하이(蝦夷)땅의 수궁(手宮)문자라는 것도 아마 북부 대륙조선에서 행하던 고대문자라고 추단”한다고 말했는데, 이는 고대 일본의 야마토왜가 고대 가야를 점령하고 임나일본부를 세웠다는 ‘임나=가야설’이 헛소리이며, 거꾸로 고대 일본은 한국인들이 세운 나라라는 사실을 언어학적으로 입증하는 것이었다. 성재 이시영과 한결 김윤경 선생의 글들을 읽으면서 드는 생각은 일제강점기 때 지식인들이 가졌던 우리 역사, 언어에 대한 이런 광대한 생각이 해방 후 모두 삭제된 데 대한 깊은 아쉬움이다. 해방 후 조선총독부 학무국에서 만든 학제 및 교육사상을 뿌리째 뽑아버리고 우리 전통의 교육사상과 교육체계의 토대 위에서 서구의 것을 선별적으로 수용했어야 하지만 일본인들이 만든 교육시스템이 지금까지 거의 그대로 내려온 것이 현재 한국 사회 학문이 겪고 있는 위기의 본질이란 생각이다. 

우리 고유의 사상체계는 학문의 대상에서조차 제외되면서 우리 얼이 없는 껍데기 학문이 판치다 보니 OECD 국가 중에서 김대중 대통령이 수상한 평화상 외에 노벨상 수상자 한 명 없는 부끄러운 현상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 성재 이시영의 『감시만어』를 읽으면서 해방 후 친일세력이 청산되어 성재같은 이들의 역사관과 학문관이 우리 사회의 정상적인 역사관과 학문관이 되었다면 지금의 모습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랬다면 아직까지 조선총독부 역사관을 추종하는 이들이 목청 높일 수 있는 사회는 되지 못했을 것이고, 우리 사회의 정신세계가 지금처럼 황폐해지지는 않았을 것이란 생각이 드는 것은 비단 나만의 생각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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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육사를 방문한 부통령 이시영, 오른쪽이 교장 김홍일, 왼쪽이 부교장 이한림(1949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