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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2017년 10월 1일 - 초대부통령 이시영 선생의 역사관(5) 등록일 2017.10.03 13:50
글쓴이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조회 441
-독립운동가에서 민주화 투사로-

-하루아침에 장군이 된 김윤근

국민방위군 사건이란 것이 있다. 6·25 전쟁 중에 제2국민병으로 징집된 청장년들 10만 명 이상이 얼어 죽거나 굶어죽은 사건이다. 이승만 정권의 징집명령에 따라서 입대한 10만 명 이상의 국민방위군이 정작 인민군은 구경도 못해 본 체 이승만 정권의 무능과 부패 때문에 목숨을 잃은 사건이다. 이승만 정권은 1950년 12월 21일 군인과 경찰, 공무원이 아닌 만17세 이상~40세 이하 장정들을 국민방위군으로 징집하는 ‘국민방위군 설치법’을 공포했다. 국방부장관 신성모는 군 경력이 없는 김윤근을 하루아침에 준장으로 만들어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김윤근은 지청천이 만든 우익 반공 청년단체 대동청년단 출신이었는데, 대동청년단이 이승만의 사조직인 ‘대한청년단’에 흡수 된 후 단장을 맡았다. 부사령관 윤익헌도 대동청년단과 대한청년단 간부 출신이었다. 간부 상당수가 우익 반공 청년단체 출신들이니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었다.

-죽음의 행진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세가 다시 뒤집히자 이승만 정부는 1951년 1·4 후퇴라 불리는 제2차 서울철수 작전을 감행하는데, 이때 50만여 명에 달하는 국민방위군도 남하대열에 올랐다. 혹한에 떠는 국민방위군들에게 식량도 피복도 지급되지 않았다. ‘보급이 전투 못지 않게 중요하다’는 병법의 기초도 무시한 채 마구 징집한데다 이승만 정권 특유의 부패가 더해져서 그렇잖아도 부족한 보급품을 간부들이 빼돌려 착복했던 것이다. 그래서 얼어죽고, 굶어죽은 시신들이 즐비한 가운데, 해골만 남은 청장년들은 죽음의 행진을 계속해야 했고, 이를 ‘해골들의 행진’이라고 불렀다.

-공산주의자의 선전?

곳곳에서 국민방위군들이 죽어가고 있다는 소문이 무성한 가운데 제보를 받은 일부 국회의원들의 폭로로 세상에 알려졌다. 야당의원들은 1951년 1월 15일 ‘제2국민병 비상대책위원회’를 결성하고 사건의 진상을 조사했다. 그 결과 무려 9만명에서 12만명에 달하는 청장년들이 목숨을 잃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내무부 장관 조병옥은 대통령 이승만에게 국방장관 신성모에 대한 처벌을 요구했으나 이승만은 거부했고, 이승만의 측근이었던 전 서울시장 윤보선도 관련자 처벌을 요구했으나 이승만 정권은 “공산주의자들의 선전”이라고 거부했다. 이 사건 와중인 1951년 2월 육군 11사단 9연대가 경남 거창 신원면 주민 719명을 마을 뒤 산골짜기로 모아 죽인 ‘거창 양민학살사건’까지 드러나면서 이승만 정권의 무능, 잔학성이 다시 한 번 확인되었다. 이 두 사건으로 국민여론이 비등했지만 정권 담당자들의 주된 관심사는 이승만 생일(3월 26일)이어서 “이승만 대통령 생일 기념 선물 쇄도(『부산일보』 1951년 3월 20일자)”이라는 보도가 나올 정도였다.

-식민사학자 이선근이 재판장

국회 조사위원회의 진상조사 결과 의혹이 사실로 드러나 물자를 빼돌려 10만 여 명의 죄없는 청장년들을 살해한 국민방위군 간부들이 군법회의에 회부되었는데, 재판장이 국방부 정훈국장 이선근이었다. 이선근 역시 지청천이 만든 대동청년단 준비위 부위원장 출신이므로 처음부터 봐주기 위해 재판장으로 선정한 것이었다. 와세다대 사학과 출신의 이선근은 식민사학자이자 만주국 협화회 협의원을 역임한 친일파였다. 이선근은 군수물자를 빼돌려 착복하고 정치권에 상납해 10만여 명을 죽게 만든 민족적 대참사에 대해 사령관 김윤근 무죄, 부사령관 윤익헌 징역 3년 6개월을 선고해 큰 충격을 주었다. 국회는 1951년 4월 30일 국민방위군 해체를 결의했고, 1심 선고에 대해 비판여론이 들끓는 가운데 중앙고등군법회의는 7월 19일 김윤근, 윤익헌 등 5명에게 사형을 선고했고, 8월 12일 전격 집행했다. 국민방위군 간부들이 착복한 수 십 억원 중 상당수가 이승만 계열 정치인들에게 상납되었다는 소문이 무성했지만 이들이 전격 처형되는 바람에 더 이상 조사가 이루어지지 못했다.

-시위소찬 부통령의 사임

국민방위군 사건이 드러나자 부통령 이시영은 큰 죄책감에 빠졌다. 이승만은 친일파들과 극우 반공 청년 단체를 국정의 두 동력으로 삼았기에 독립운동가 출신 부통령이 활동할 공간은 없었다. 그러나 이시영은 이 사건에 책임을 느끼고 1951년 5월 9일, 만 여든 두 살의 노구로 부통령직을 사임했다. 이시영은 「사임사」에서 3년 간의 부통령 시절 “하나로부터 열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시위소찬(尸位素餐:높은 공직에 앉아 공적도 없이 녹만 먹는다)에 지나지 못했다”면서 회한에 차서 말했다.
“이것은 그 과실이 오로지 나 한 사람의 무위무능에 있었다는 것을 국민 앞에 또한 솔직히 표명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매양 사람은 사람으로 하여금 사람답게 일을 하도록 해 줌으로써 사람의 직능 그를 발휘할 수 있는 것이니 만약에 그렇지 못할진대 부질없이 공위(空位)에 앉아 허영에 도취될 것이 아니라 차라리 그 자리를 깨끗이 물러나는 것이 떳떳하고 마땅한 일일 것이다(이시영, 「부통령 사임사」)”
“그러나 내 아무리 노혼(老昏:늙고 혼미함)한 몸이라 하지만 아직도 진충보국(盡忠報國:충성을 다해 나라에 보답함)의 단심(丹心)과 성열(盛熱)은 결코 사르라지지 않았는지라 잔생(殘生:남은 인생)을 조국의 완전통일과 영구독립에 끝끝내 이바지할 것을 여기에 굳게 맹서한다(이시영, 「부통령 사임사」)”

-이승만을 살려준 6·25 남침

이시영은 그의 말대로 시위소찬했는데도 책임을 지고 사임했지만 대통령 이승만은 사임은커녕 일체의 반성도 하지 않았다. 반성은커녕 헌법을 개정해 대통령직을 연임하려 시도했다. 1948년의 제헌국회 선거에서 총 200석 중 이승만의 대한독립촉성중앙회는 55석, 득표율은 24%에 불과했다. 이승만은 한민당 세력을 끌어들여 대통령에 당선되었지만 거듭된 실정으로 국민들이 등을 돌렸다. 1950년 5월 30일 치러진 제2대 총선거에서 이승만의 독립촉성중앙회는 득표율 6.8%로 14석으로 줄어들었다. 한민당 후신인 민주국민당도 참패했고 승자는 전체 210석 중 126석으로, 득표율 62%를 달성한 무소속이었다. 당시 헌법은 대통령을 국회에서 선출하게 되어 있으므로 이승만 정권의 몰락은 시간 문제였다. 그러나 총선을 치른지 불과 한 달 남짓만에 북한군이 전면 남침하면서 이승만 정권은 기사회생했다.

-5·26 정치파동과 국제구락부 사건

부산으로 쫓겨 온 이승만은 국회의 간선제로는 대통령에 연임될 가망이 없다고 보고 직선제로 바꾸려했다. 이에 맞선 야당 의원 123명이 1952년 4월 17일 내각책임제 개헌안을 제출하자 

이승만은 1952년 5월 25일 부산과 경상남도, 전라남북도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다음날 50여명의 국회의원들을 헌병대로 끌고 갔다. 이것이 ‘5·26 정치파동’ 혹은 ‘부산 정치파동’이다. 

이때 부통령직을 사임한 성재 이시영은 만 83세의 노구였다. 이시영은 이승만의 무능과 독재를 방치했다가는 나라가 망하겠다는 생각에 조병옥 등과 함께 반독재 민주화 투쟁에 나섰다. 6월 20일 부산 국제구락부에서 「반독재 호헌구국선언」을 발표하기로 한 것이다. 정권의 감시 때문에 표면적으로는 ‘문화동지간담회’란 이름을 내걸었는데, 이시영과 조병옥을 필두로 심산 김창숙, 이동하, 서상일, 전진한 등의 독립운동가들과 유진산, 장면 등의 정치가 등 77명의 정당, 사회·문화단체 지도자들이 위원으로 포진했다. 그러나 선언은 예정대로 발표되지 못했다. 선언 발표 당일의 사건을 여기 참석했던 정치인 고흥문 ( (전 국회부의장)의 회고에서 보자.

“사회를 맡은 유진산 씨가 등단하여 막 개회선언을 마치는 순간 또다시 민주주의의 새싹은 짓밟혀지고 말았다. 와지끈! 출입문이 박살나면서 수많은 괴한들이 대회장 안으로 난입해 들어왔다. 그들은 닥치는 대로 의자·화분 등을 뒤엎고 대회에 참석 중인 1백여 인사와 40여 명의 국내외 기자들을 향해 무차별로 돌멩이, 부숴진 의자, 깨어진 화분을 집어 던졌다. 심지어는 발길질, 주먹질을 해댔다. 대회장은 삽시간에 수라장이 되었고 부상자가 속출했다. 당시 대회장에 참석해 유석(조병옥)과 진산을 거들어 주고 있던 나는 의자로 머리를 가리고 황급히 조병옥 박사와 이시영 씨 등을 감싸고 피신했다. 그때 조 박사는 화분을 뒤집어 써 타박상을 입었고 김창숙·서상일 씨 등도 부상을 당했다. 현장에서 유진산·김동명·이정래……등이 헌병에게 체포되어 경남 도경찰국에 구금되었다(고흥문, 『못 다 이룬 민주의 꿈』)”

-이후에 발생한 일

이승만은 그해 7월 4일 야당 의원들의 참석을 저지한 채 직선제 개헌을 밀어붙였고 부정선거 끝에 대통령에 연임되었다. 10만 명 이상을 죽게 만든 국민방위군 사령관 김윤근에게 무죄를 선고한 이선근은 이후 서울대 교수, 문교부장관,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 성균관대·영남대·동국대 총장, 한국정신문화연구원(현 한국학중앙연구원)초대 원장 등으로 승승장구하면서 이승만 정권은 물론 유신체제 찬양에도 앞장섰다. 한국현대사의 뒤틀린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다. 
반면 평생을 독립운동에 투신했던 성재 이시영은 해방 후 팔순이 넘은 노구로 이승만 독재에 맞서는 민주화 인사의 삶을 살아야 했다. 몸으로는 평생 독립전쟁과 민주화투쟁에 나서면서 정신으로는 단군부터 시작하는 우리 역사의 정통성을 굳게 견지했던 성재 이시영, 그의 삶은 일제강점기가 좋았다는 뉴라이트들이나, 이승만은 비판하면서도 한국 고대사는 조선총독부의 역사관을 추종하는 짝퉁 진보 모두에게 반성의 자료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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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1)대한민국 정부통령 및 초대각료, 왼쪽이 대통령 이승만, 오른쪽이 부통령 이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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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2) 대구에서 징집된 국민방위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