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와 혁신으로 꿈을 현실로 만드는 세상!

학술 이야기

  • 한국 바른역사이야기
  • 이덕일의 역사특강

논문 자료

HOME > 학술 이야기 > 이덕일의 역사특강

제목 2017년 10월 9일 - 훈민정음에 대한 생각(1) 등록일 2017.10.11 11:09
글쓴이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조회 3859
-최만리가 정음 창제에 반대한 이유

얼마 전에 쓴 ‘초대부통령 이시영 선생의 역사관’에서 성재 이시영이 ‘훈민정음 이전’에 이미 우리 고유 문자가 있었다고 생각했다고 썼다. 일제강점기 때 국어학자 김윤경도 훈민정음 이전에 우리의 고유 문자가 있었다고 봤다고도 덧붙였다. 이것은 새로운 학설이 아니라 훈민정음 창제 당시에 세종과 최만리 사이에 오간 대화에도 나와 있는 내용이다. 세종 26년(1444) 2월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는 언문(諺文) 제작을 반대하는 상소문을 올렸다가 ‘만고의 역적’으로 지탄 받지만 그가 무슨 논리로 정음 창제를 반대했는지는 잘 알려지지 않고 있다. 최만리의 논리 중의 하나는 설총이 만든 이두(吏讀)로도 모두 표현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한자(漢字)를 응용한 이두를 배우면 한문 습득에도 도움이 된다는 것이었다. 이두는 형용사 등을 표현하는 데는 한계가 뚜렷하지만 기타의 말 등은 큰 문제없이 표기할 수 있다.

-정음은 옛 글자지 새로운 글자가 아니다?.

최만리는 언문 제작을 반대하는 상소에서 지금 사람들의 상식으로는 놀라운 말을 한다. “혹자는 ‘언문은 모두 본래 옛 글자〔古字〕지 새로운 글자〔新字〕가 아니라고 말한다〔儻曰諺文皆本古字, 非新字也〕”는 것이다. 최만리는 훈민정음이 옛 고문자를 본 따서 만든 것인데, 이것이 전문(篆文)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조선의 여러 학자들도 훈민정음이 어느 문자의 영향을 받았는지 설왕설래가 적지 않았다. 크게 보면 원래 우리 전통의 글을 땄다는 내재설과 외부 문자를 본떴다는 외래설로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내재설은 최만리가 말한 옛 글자〔古字〕라고 볼 수 있는데 먼저 외래설에 대해서 살펴보자. 외래설은 조선의 여러 학자들이 주창한 것인데, 성종 때 학자 성현은 『용재총화』 제7권에서 언문은 “초성·종성(初終聲) 8자, 초성(初聲) 8자, 중성(中聲) 12자의 글자체는 범자(梵字)를 본받아 만들었다”라고 말했는데, 범자란 고대 인도의 언어인 산스크리트어를 뜻한다.

-정음과 몽골의 파스파 글자

조선 후기의 이익은 『성호사설(星湖僿說)』의 「언문」이란 글에서 정음이 몽골의 파스파 글자를 본떴다고 보았다. 세종이 정음을 만들 때 요동으로 귀양 온 명나라 학사 황찬(黃鑽)가 있었는데, 성삼문 등에게 무려 열세 번이나 가서 질문하게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 전하는 정음이 중국의 한문과 판이하게 다른데 무슨 관련이 있었겠느냐면서 만약 황찬이 정음 창제에 도움을 주었다면 몽골문자인 파스파(巴思八) 글자 외에는 다른 것이 없었을 것이라고 서술했다. 파스파 글자란 서기 1269년(고려 원종 10년) 원 세조의 명으로 티베트 승려 파스파〔巴思八〕가 만든 글자다. 파스파는 쿠빌라이 즉위 후 국사(國師)가 되어 티베트를 통치한 사캬 왕조의 시조로서 티베트 불교를 융성시켰다. ‘파스파’는 ‘성스러운’, 또는 ‘아주 훌륭한’ 등의 뜻으로서 팔사파(八思巴)라고도 음역(音譯)되는데 정음과 비슷하다.

-돌고 도는 문자

고대 인도 문자가 굽타 문자를 낳고, 굽타 문자가 티베트 문자를 낳았으며, 이것이 몽골의 파스파 문자로 연결되니 성현이 『용재총화』에서 범자(梵字), 곧 고대 인도어의 영향을 받았다는 말이나 이익이 『성호사설』에서 몽골의 파스파 글자의 영향을 받았다고 한 말이 모두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다.

-전문(篆文)과 가림토 문자

내재설에 대해서는 최만리가 말한 전문(篆文)을 들 수 있다. 최근에는 『환단고기』 『단군세기』에 나오는 가림토(加臨土) 글자를 드는 사람들이 있다. 이시영이나 김윤경은 ‘문화 유씨 족보에 쓰여진 왕문(王文)의 서법과 평양 법수교(法首橋)의 고비(古碑)나 남해도 암벽의 글자’ 등을 정음 이전에 존재했던 우리 글들의 원형으로 들고 있다. 전자(篆字) 같기도 하고 부적(符籍) 같기도 한 이 글자들을 정음 이전의 우리 고유 글자로 볼 수 있지 않느냐는 시각이다. 『단군세기』의 가림토 문자는 모두 38자인데, 지금의 훈민정음과 아주 유사하다. 그런데 『단군세기』의 가림토가 훈민정음 창제에 영향을 주었다고 객관적으로 인정받으려면 중간의 연결고리가 필요하다. 훈민정음 창제 이전의 기록들에 가림토 글자가 몇 자라도 남아 있어야 훈민정음 창제에 영향을 준 글자로 받아들일 수 있는데 아직 연구가 부진하기 때문인지 현재까지 그런 연결고리는 제시되지 못하고 있다.

-훈민정음에 대한 질문

일제강점기 때 중국의 절강성(浙江省) 가흥(嘉興)에 있던 이시영 선생과 국내에 있던 김윤경 선생이 거의 동시에 훈민정음 창제 이전에 우리 고유문자가 있었다고 주장한 것은 이때만 해도 국내외의 비판적 지식인들이 이런 질문들을 했음을 말해준다. 훈민정음의 뿌리를 찾으려는 학문적 노력이 국어학자는 물론 독립운동가에게도 있었다는 것이다. 한글날을 국경일로 정하고 기념하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훈민정음의 뿌리에 대해서 깊게 연구해야 한다. 다음 편에서는 현재의 ‘한글맞춤법 통일안’이 과연 훈민정음을 창제한 세종의 뜻에 부합하는 글자체계인지도 생각해 보려고 한다.


2.JPG




1.JPG

〈사진: 산스크리트 문자와 파스파 문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