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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2017년10월26일 - 한문공부 이야기 1 등록일 2017.10.26 14:44
글쓴이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조회 920
-이재호 선생님과 한문

내가 식민사학을 폐기시킬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된 것은 한문 해석에 어느 정도 자신감이 붙고 난 후이다. 표의문자인 한문을 표음문자인 한글로 옮기는 데는 언어구조상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나는 부산대학교 명예교수 이재호 선생님을 만나고 나서 한문에 능통하다는 것이 어느 수준을 말하는 것인지 알 수 있었다. 아마 앞으로는 이재호 선생님 수준의 한문 실력자가 나오기는 힘들 것이다. 내가 한 번은 “한문책과 한글책 중 어느 것이 읽기 편하십니까?”라고 물었더니 “나야 당연히 한문으로 된 책이 편하지요.”라고 답변하셨다.

-사육신 바꿔치기 사건

이재호 선생님은 내게 역사를 대하는 자세도 가르쳐 주셨다. 그 한 예가 ‘사육신 바꿔치기 사건’이다. 유신체제가 종말로 치달리던 1977년 9월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사육신 유응부(兪應孚)를 자신의 조상인 김문기(金文起)로 바꾸려고 시도했다. 김재규 부장이 국사학계(?)의 태두라는 이병도 박사를 만나 이 이야기를 하자 이병도는 선뜻 바꿀 수 있다고 자신했다. 태두의 명령에 따라 국사편찬위원회는 특별위원회를 구성해서 만장일치로 유응부를 끌어내리고 김문기를 사육신으로 올리기로 결정했다. 이재호 선생은 자신의 책 『한국사의 비정(批正)』에서 이때의 특별위원회 명단을 공개했다.
“이선근, 이병도, 신석호, 백낙준, 유홍렬, 조기준, 한우근, 전해종, 김철준, 고병익, 최영희, 김도연, 이기백, 이광린, 김원룡”
한 마디로 해방 후 한국 역사학계를 이끌어온 인물들의 명단이 총 망라되어 있는 것이다. 이 사간을 되새길 때 중요한 점은 김문기 선생을 욕보이면 안 된다는 점이다. 김문기 역시 ‘상왕 단종 복위기도 사건’으로 세조에게 사형당한 단종의 충신이기 때문이다.

-어정(御定)이 무슨 뜻인지는 아는지?

조선 왕조 내내 사육신 문제는 큰 논쟁거리였다. 수많은 우여곡절 끝에 정조대왕이 재위 15년(1791) 단종의 무덤인 장릉(莊陵)에 왕명으로 어정배식단(御定配食壇)을 세우고 육신(六臣)을 추향했다. 이때 ‘남효온, 김시습, 이맹전·조여·원호·성담수’ 등 ‘세상에서 말하는 생육신’도 동시에 추향됐다. 
그런데 어정배식단의 가장 상위는 정승급으로서 세조(수양대군)에게 죽은 황보인·김종서·정분을 모신 ‘삼정승’이었고, 그 다음이 공조판서 김문기는 이조판서 민신, 병조판서 조극관을 모신 삼중신(三重臣)이었다. 그 아래가 사육신이었다. 그러니 아무리 일본인들에게 역사 조작을 배웠다고 하더라도 이병도가 “삼중신이 사육신보다 더 상위이니 삼중신 선양사업을 하는 것이 더 의미 있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면 김재규도 살고 김문기도 살았을 것이다. ‘어정(御定)’이란 임금이 정했다는 뜻이니 이병도가 아무리 학문권력을 갖고 있어도 200년 전에 왕명으로 정리한 문제를 바꿀 수는 없었다. 그러나 이병도는 자신이 하면 바꿀 수 있다고 단언했고, 실제로 그의 의중대로 국사학계와 동양사학계를 좌지우지하던 열다섯 명의 역사학자들이 만장일치로 유응부를 탈락시키고 김문기로 대체시켰던 것이다. 『동아일보』 1977년 9월 24일자는 “5백년 만에 빛을 본 충신의 고절(高節), 사육신 유응부는 김문기의 잘못”이란 제하의 기사를 크게 싣고, “국사편찬위원회에서는 교과서 개편에 착수한다.”고 보도했다. 문교부장관을 역임한 이선근·이병도에, 신석호 등 전·현직 국사편찬위원장, 서울대 총장을 역임한 고병익 등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 서강대 교수 등이 만장일치로 찬성했으니 끝난 문제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유응부가 쫓겨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우리 사회 살아 있는 사육신 정신 

그러나 이들의 반사회적·반역사적 폭거는 우리 사회 일각에 이재호 선생님처럼 사육신의 선비정신을 계승하신 분들이 소수나마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무시한 처사였다. 이들 어용학자들의 예상을 깨고 부산대학교 교수이던 이재호 선생님은 『부산일보』 9월 28일자에 이를 비판하는 기사를 썼고, 이가원 선생 등도 『중앙일보(10월 2일)』에 반론을 썼다. 뒤늦게 논란이 일자 『동아일보』도 속았다는 것을 알고 김성균 씨의 반론을 두 차례 게재(9월 30일, 10월 12일)했다. 물론 이현희(『중앙일보』 10월 2일) 교수나 김창수(『동아일보』 10월 7일) 씨처럼 국사편찬위원회의 결정을 지지하고 나서는 학자들도 없지 않았지만 사육신을 바꿔치기하려한 이 희대의 사기극에 국민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

-사육신 묘인가 사칠신 묘인가?

‘한사군=한반도설’, ‘임나=가야설’이 기초부터 모두 무너져 내렸는데도 지금까지 한국고대사학계가 “낙랑군은 평양에 있었다”, “가야는 임나다” 따위의 말 같지도 않은 주장을 거듭하는 것은 아직도 ‘사육신 바꿔치기 사건’ 따위가 통할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국사편찬위원회는 1978년 봄에 “사육신의 묘역에 김문기의 허장(虛葬)을 봉안하고, 유응부의 묘도 현상 그대로 공존시킨다”는 결정을 내렸다. 김문기도 사육신이고 유응부도 사육신이라는 것이다. 김문기를 집어넣으려면 사육신을 사칠신으로 확대해야 함에도 더하기도 못 배웠는지 둘 다 사육신이라고 결정했다. 그래서 이재호 선생님은 『조선사 3대논쟁(역사의 아침)』에서 “이것은 우리나라 사당 봉안의 주향, 종향 절차도 모르는 상식 부족의 소치다”라고 비판하셨다. 매년 노벨상 시즌이 되면 우리나라가 늘 관중석에서 바라볼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김문기를 사육신으로 올리면 삼중신은 이중신이 되어야 하나?

-이재호 선생님을 찾아온 중앙정보부원 

이재호 선생님 같은 분들이 없었으면 유응부의 묘는 파헤쳐져서 쫓겨나고 김문기의 허묘로 대체되었을 것이다. 특별위원회의 행태는 정확하게 반역사적 패륜의 정점에 위치한다. 이재호 선생은 그때 자신의 집으로 “중앙정보부 요원이 찾아와서 은근히 협박했다.”고 내게 말했다. 그러나 아무리 나는 새도 떨어뜨리는 중앙정보부인들 “사육신은 유응부가 맞다”고 주장한다고 거꾸로 매달고 물고문을 가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재호 선생님은 2016년 11월 9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셨다. 구순이 훨씬 넘은 고령에도 나를 만나면 “내가 10년만 젊었어도 천고(遷固:필자의 호)를 도와서 일 좀 더 할텐데…”라고 아쉬워하셨다. 그때 기준으로 10년 더 젊다면 80대 중반이었다. 선생님의 이런 자세는 나로 하여금 어떻게 역사학을 해야 하는지 잘 가르쳐주셨다. 
거동이 불편하셨던 선생님이 내게 꼭 가보고 싶은 곳이 두 곳 있다고 해서 김병기 선생과 함께 모시고 갔다. 한 곳은 동대문에 관우를 모신 동묘(東廟)이고, 다른 한 곳은 다산 정약용 선생의 생가였다. 불편하신 걸음으로 생애 마지막으로 다산 생가를 둘러보던 이재호 선생님의 감회 어린 눈빛이 잊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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