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와 혁신으로 꿈을 현실로 만드는 세상!

학술 이야기

  • 한국 바른역사이야기
  • 이덕일의 역사특강

논문 자료

HOME > 학술 이야기 > 이덕일의 역사특강

제목 2017년 10월17일 - 조선 유학자들의 역사관 혁명 등록일 2017.10.18 16:12
글쓴이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조회 539
-한국 학문의 문제점

우리나라가 세계 10대 교역국이면서도 매년 노벨상 시즌만 되면 늘 관중석에서 박수나 치고 있어야 하는 근본적 이유가 있다. 일제 강점기 이래로 학문의 주체성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조선총독부 학무국에서 만들어 놓은 틀 속에서 학문을 하니 말 그대로 뛰어야 벼룩일 수밖에 없다. 일제강점기는 두 종류의 전쟁을 치렀다. 하나는 빼앗긴 강토를 되찾기 위한 영토전쟁이고, 다른 하나는 역사해석을 두고 다툰 역사전쟁이었다. 1945년 8월 15일 일제가 패망함으로써 영토전쟁은 끝났지만 역사전쟁은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다시 말해 우리의 정신세계는 아직도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회가 장악하고 있다.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계통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계통이다. 어떤 계통을 거쳐 여기까지 이르렀는지 인식하는 것이 자국사 공부의 시작이다. 그 시작은 뿌리를 찾는 것이다. 뿌리가 있어야 줄기가 나고 꽃이 피기 때문이다. 『용비어천가』 제1장이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아니 흔들릴 새…”라고 시작한 것이 이 때문이다. 대한제국이 망할 지경에 처하자 지식인들 사이에 왜 이 지경이 되었는지에 대한 자각이 일었다. 이런 자각이 조정에서 벼슬하던 유학자들 사이에서 일어났다는 점이 의미가 있다. 그 중 한 사람인 무원 김교헌(1868~1923)은 성균관 대사성과 규장각 대제학을 지낸 당대 최고의 유학자였다. 지금 조계사 자리가 바로 김교헌의 집으로서, 조선 영조 때 임금에게 하사 받아 내려온 삼백여 간의 왕자궁(王子宮) 자리였다.

-사대주의를 버리니 단군이 보였다.

김교헌 등은 이 나라가 망국에 이르게 된 원인을 유학의 사대주의라고 보았다. 사대주의는 남을 숭배하고 남의 관점으로 우리를 바라보는 것이다. 김교헌 등의 유학자들이 사대주의를 버리니 ‘우리’가 보였고, ‘뿌리’가 보였다. 그래서 자연 ‘단군’에 가 닿았다. 일제도 마찬가지였다. 한국을 영구히 점령하고 한민족을 말살하기 위해서는 그 뿌리를 뽑아 버려야 했다. 그래서 일제는 단군을 일연이 고려 때 창작한 인물이라고 매도했다. 김교헌·박은식·유근 등 사대주의를 버린 유학자들이 편찬한 역사서가 『단조사고(檀祖事攷)』다. 우리 역대 학자들이 단군에 대해서 쓴 문헌을 모은 책이다. 이때 단군을 새로 발견한 것이 아니다. 조선 건국 다음 달인 태조 1년(1392) 8월 11일 예조판서 조박은 태조에게 “(고)조선의 단군은 동방에서 최초로 천명을 받은 임금〔朝鮮 檀君, 東方始受命之主〕”이라면서 국가에서 제사를 지내야 한다고 청했다. 조선 개국 초부터 단군을 국가에서 제사했다는 뜻이다.

-한국 사찰에 삼성각이 있는 이유

뿐만 아니라 『고려사』 지리지 강화현 조에는 강화도 마리산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마리산 산꼭대기에 참성단(塹星壇)이 있는데, 세상에 전하기를 단군의 천단(天壇:하늘에 제사 지내던 제단)이라 한다. 전등산에는 삼랑성(三郞城)이 있는데, 세상에 전하기를 단군이 세 아들을 시켜 쌓은 것이라 한다.”
강화도 마리산의 참성단이 단군이 하늘에 제사 지내던 유적이라는 이야기가 고려 때 이미 있었다. 강화도뿐만 아니라 『고려사』 지리지 유주(儒州:황해도 문화) 조에는 “삼성사(三聖祠)가 있는데, 환인·환웅·단군사〔檀因·檀雄·檀君祠〕가 있다”라고 말하고 있다. 삼성사는 세 성인(聖人), 즉 환인·환웅·단군을 제사지내는 전각이다. 지금 전국 각지의 많은 사찰에 환인·환웅·단군을 모시는 삼성각(三聖閣), 삼성전(三聖殿) 등이 있는 것은 한국 불교가 민족종교화 한 것으로 고무적인 일이다.

-금나라, 청나라도 단군의 혈통

김교헌·박은식·유근 등이 지은 『단조사고』에는 「단군혈통도」가 실려 있다. 이 혈통도는 단군의 혈통을 계승한 동이족 여러 국가들의 계통을 밝혀놓은 것인데, 크게 보면 둘로 귀속된다. 
첫째는 ‘①조선→한(대륙의 전삼한)→삼한(반도의 후삼한)→신라→고려→조선’의 계보다. 이는 우리가 보통 한국사의 맥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물론 식민사학은 일제가 만든 ‘반도사’의 틀에 갇혀 대륙에 있던 전삼한(前三韓)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둘째는 ‘②부여→동부여→고구려→발해→여진→금→후금(청)’의 계보다. 단군의 혈통들이 만든 나라가 크게 ‘고려→조선’과 ‘금→청’으로 연결된다는 역사인식이다.

-금나라 시조는 고려에서 왔다.

유의할 점은 둘은 단절시키면 안 된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고구려는 예(濊) 및 마한등과도 연결되어 있어서 ①과 ②는 서로 연결된다. 김교헌·박은식·유근 등이 유학의 사대주의를 버리니 비로소 단군을 공동조상으로 둔 민족계통을 인식할 수 있었고, 금과 청까지도 단군 혈통 국가로 인식할 수 있었다. 이는 자의적인 것이 아니라 중원을 장악한 금나라 정사인 『금사(金史)』에도 그 근거가 나온다. 『금사』 본기(本紀)의 ‘시조 함보’조는 이렇게 시작한다.
“금나라 시조의 휘 함보는 처음 고려에서 왔다〔金之始祖諱函普, 初從高麗來〕”
금나라 시조 함보가 고려 사람이라는 이야기다. 그래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2대 대통령이셨던 박은식 선생이 「몽 배금 태조(夢拜金太祖:꿈에서 금나라 태조를 보고 절했다)」 라는 글을 남긴 것이다.

-남한산성의 비극

극단적인 사대주의자들이 광해군의 중립외교에 반발해 인조반정을 일으켜서 정권을 잡고는, 이른바 숭명배청(崇明排淸:명나라를 숭배하고 청나라를 배격한다) 따위를 국가 이념으로 삼아서 같은 형제국인 후금(청)을 적대했다. 정묘·병자호란의 참화는 광해군이 계속 집권했으면 일어나지 않았을 비극이다. 지금은 다른가? 조선총독부가 만든 ‘반도사’의 틀에 갇혀서 우리 역사를 매도하는 식민사학이 번성한 결과 아직도 남의 관점에서 우리를 바라보는 노예 인식이 우리 사회에 팽배하다. 미국 항공모함과 전폭기들이 북한을 실제로 공격한다면 남한도 쑥대밭이 될 것은 명확하고도 객관적 사실이다. 다시 전쟁이 난다면 그 참화는 6·25가 비교가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미국의 관점으로 현재의 상황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병자호란이 과거의 일이 아니다.

1.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