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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2017년 8월 21일 - 한국고대사의 일본인 ‘신의 손’들 등록일 2017.09.27 21:53
글쓴이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조회 1172
-조선총독부가 발견한 점제현 신사비

‘점제현 신사비’라는 것이 있다. 한국에서 가장 권위가 있다는 『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는 “평안남도 용강군 해운면 성현리에 있는 낙랑시대의 고비(古碑)”라고 정의해 놓았다. 그러면서 “1914년 조선총독부 고적조사단에 의해 발견되었다”라고 설명을 시작하고 있다. 낙랑군은 산하에 25개 현이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점제현’이다. 서기전 108년 설치된 낙랑군 점제현의 신사비(神祠碑)가 2천여년 뒤에 발견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면 당연히 이 비가 사실인지 여부부터 가려야 한다. 그러나 남한 학계에서 이 비의 진위 여부를 가린 적은 한 번도 없다. 무조건 사실이라고 전제해놓고 그 의미를 칭송하기에 바쁜 논문들이 100%다.

-점제현 신사비와 『환단고기』를 대하는 자세

이들이 ‘점제현 신사비’를 대하는 자세는 『환단고기』를 대하는 자세와는 180도 다르다. ‘점제현 신사비’는 무조건 사실이라고 전제하는 반면 『환단고기』는 무조건 가짜라고 전제하고 비판부터 하고 본다. 서기전 108년 설치되었다는 낙랑군 점제현 신사비가 1914년에, 그것도 조선총독부에 의해서 ‘느닷없이’ 발견되었다면 당연히 그 진위부터 따져봐야 한다. 『환단고기』는 서문에 의하면 계연수가 1911년에 그 전부터 내려오돈 『단군세기』 등의 책을 묶어서 편찬했다고 한다. 1911년에 계연수가 묶은 책에 수천 년 전의 이야기가 실려 있으면 역사학적 방법론에 의해서 ‘진위검증’을 하는 것이 맞다. 마찬가지 논리로 1914년에 조선총독부가 ‘점제현 신사비’를 발견했다면 당연히 ‘역사학적 방법론’에 따라서 진위검증을 해야 한다. 그러나 ‘점제현 신사비’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진짜라는 것이다. 왜? 조선총독부가 발견했으니까? 일본인 학자들이 발견했으니까 사실이라는 것이다. 논리는 단순하다.

-신의 손, 세키노 타다시와 이마니시 류

‘점제현 신사비’를 발견한 인물은 도쿄제국대학 출신의 이마니시 류(今西龍:1875~1932)다. 고고학으로 낙랑군이 평양에 있었다고 믿게 만든 세키노 타다시가 이른바 “신(神)의 손”인 것처럼 이마니시 류도 ‘신의 손’이다. 가는 곳마다 한나라, 낙랑 유물들을 발견했다. 그나마 세키노 타다시는 이 모든 유물을 ‘우연히 발견했다’라고 써놓아 수수께끼의 단서라도 남겼지만 이마니시 류는 그렇게 하지도 않았다. 최근 세키노 타다시가 북경의 골동품상가인 유리창가에서 조선총독부 돈으로 ‘한나라 유물, 낙랑 유물’을 마구 구입해 조선총독부에 보냈다는 일기가 발견되었다. 이 일기의 존재에 대해서 입 다물고 있던 식민사학자들이 세키노 타다시를 옹호하기 바쁜 모습은 그리 놀랄 일이 아니다. 당연한 반응이다. 
이마니시 류가 도 가는 곳마다 한나라 유물, 낙랑 유물들을 발견했다. 이 유물들은 2천년 동안 잠자고 있다가 이마니시 류가 나타나면 스스로 발 달린 듯 모습을 드러냈다. 이마니시 류는 1910년 11월 전축분(塼築墳)에서 ‘王〇’가 새겨진 명문(銘文)이 출토되었다면서 낙랑군 왕씨(王氏)의 유적이라고 주장했고, 1913년에는 타니(谷井濟一)와 함께 평양지역의 토성에서 ‘낙랑예관(樂浪禮官)’이라고 쓰인 와당과 ‘낙랑태수장(樂浪太守長)’이 새겨진 봉니 등을 발견했다고 주장했다. 조선총독부는 이런 유물들의 발견을 토대로 이 지역을 낙랑군 치소로 비정했다(이덕일, 『한국사 그들이 숨긴 진실』 참조) 현재 낙랑군이 평양이라는 문헌 사료는 전무한 반면 낙랑군이 중국 하북성 일대라는 문헌사료가 쏟아지자 논리가 궁색해진 한국 식민사학계가 마지막으로 버티는 고고학의 보루는 이렇게 만들어진 것이다.

-2천년 전에 발명한 시멘트? 

이마니시 류는 당초 점제현 신사비를 그 지역 면장의 소개로 찾았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막상 사진은 면장이 아니라 예닐곱살 짜리 어린아이와 찎었다. “일본인들이 왔다갔다 하더니 못 보던 비석이 새로 생겼다”는 동네사람들의 말들이 그냥 생긴 것이 아니다. 얼마 전 동북아역사재단에서 하버드대 한국학연구소에 10억원을 상납하자 그 돈으로 마크 바잉턴을 임시로 채용해 만든 『한국고대사의 한사군(The commandaries of…)』는 이 사진을 그대로 실으면서 ‘조선총독부’라고 당당하게 명기했다. 깊은 산속도 아닌 평야지대에 2천년 동안 버젓이 서 있던 비석을 한국 사람들은 아무도 보지 못했는데, 조선총독부의 이마니시 류가 하루만에 발견했다면 비단 역사학자가 아니라도 의문이 드는 것은 당연하다. 더구나 이 신사비가 서 있는 곳은 현재 평안남도 온천군 성현리 어을동으로 관광지다. 2천년 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면 문적(文蹟)의 나라 고려·조선의 문사들이 이 비석에 관한 글을 남기지 않았을리 없다. 더구나 북한에서 조사해보니 비 밑바닥에 시멘트가 묻어 있었다. 한나라는 2천년 전에 이미 시멘트를 발명했지만 이때 딱 한 번 사용하고는 이 획기적 기술을 폐기했다는 것인가? 북한에서는 또 이 신사비의 화강암 재질이 이 지역의 것이 아니라 중국 요서지역의 것이라는 사실을 성분 분석을 통해서 밝혀냈다. 그러나 아무리 역사적, 과학적 근거를 제시해도 소용없다. “조선총독부는 과학 위에 군림하고 계신다”는 것이 한국 식민사학계의 교리이기 때문이다.

-이마니시 류의 『삼국사기』 불신론

쓰다 소키치와 함께 이마니시 류가 체계화한 것이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이다. 말이 좋아서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이지 사실은 ‘『삼국사기』 전체기록 불신론’이다. 그런데 『삼국사기』 기사를 부인하려면 무언가 근거가 있어야 하지만 그런 것이 있을 리가 없다. 그래서 무작정 연대부터 맞지 않는 『일본서기』는 ‘진짜’고 『삼국사기』는 ‘가짜’라고 주장했다. 이마니시 류는 『삼국사기』 「신라본기」의 초기기록을 조작으로 몰 때는 『삼국사기』「고구려 본기」의 기년을 권위가 있는 것이라고 말하다가(이마니시 류, 『신라사연구』) 정작 『삼국사기』「고구려본기」에 대하여 언급할 때는 『삼국사기』「고구려본기」의 17대 소수림왕(小獸林王:재위 371~384) 이전의 기사는 물론 20대 장수왕(長壽王:재위 412~491) 이후의 기사도 중국사료의 기사에 의해서 조작되어 신용할 수 없다고까지 주장했다(이마니시 류, 『신라사연구』)
한국 식민사학의 ‘그때그때 달라요’라는 따로국밥 역사관의 뿌리가 이마니시 류 같은 총독부 역사학자임을 알 수 있다. 고 최재석 고려대학교 명예교수는 “『삼국사기』초기기록을 조작 ․ 날조 또는 전설로 몰아붙여 믿을 수 없다고 주장하는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은 쓰다 소키치(津田左右吉)에 의하여 체계화되어 오타 아키라(太田亮)를 지나서 이마니시 류(今西龍)에 이르러 일단 정설로 굳어진 것으로 생각된다”(최재석, 『삼국사기』 불신론 비판)라고 분석했다.

-아직도 통하는 허접한 논리

한 예로 이마니시 류는 『신라사연구:1933』에서, “신라 제1왕 박혁거세 즉위년은 후대의 왕위계승의 연대에서 계산하면 성립되지 않는다.”라고 주장했다. 그런데 박혁거세 즉위년이 후대의 왕위계승 연대에서 계산하면 성립되지 않는다고 주장하려면 그 후대의 왕이란 누구이며 왜 이 후대의 왕을 기준으로 하는지에 대해서 먼저 밝혀야 한다. 또한 그 왕의 즉위 연대를 밝히고 이떤 기준으로 어떻게 계산했더니 성립되지 않더라고 밝혀야 한다. 그러나 그런 것이 있을 턱이 없다. 한국인 식민사학자고 일본인 식민사학자고 근거는? 이라고 물으면 답은 공통적으로, ‘없다’다. 쓰다 소키치는 박혁거세의 신라 건국해인 서기전 57년이 간지(干支)로 계산하면 ‘갑자년’이므로 가짜라고 주장했다. 간지의 시작해인 갑자년에 맞추기 위해서 조작했다는 것이다. 신라는 갑자년에 건국했어도 갑자년에 건국했다고 쓰면 안 된다. 이 따위 친일 매국의 논리가 아직도 ‘정설, 통설’ 따위로 행세하는 대한민국, 이 나라의 진짜 독립은 아직 멀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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