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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2017년 6월 29일 - 예언자적 지식인 석주 이상룡 등록일 2017.09.27 19:24
글쓴이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조회 1075
일제에게 나라를 강탈당한 이듬해(1911) 1월 5일. 안동의 석주 이상룡은 망명길에 오른다. 그는 망명일기인 「서사록(西徙錄)」을 쓰는데, 지금 보면 놀라운 내용이 많다. 그의 나이 이미 만 쉬흔세살, 독립전쟁에 나서기엔 많은 나이였지만 2월 27일 압록강을 건너며 ‘강을 건너다〔渡江〕란’ 시를 남겼다.
칼날보다 날카로운 삭풍이/차갑게 내 살을 도려내네…
이 머리는 차라리 자를 수 있지만/이 무릎을 꿇어 종이 될 수는 없도다…
누구를 위해 머뭇거릴 것인가/호연히 나는 가리라.

이상룡을 비롯해서 서울에서 망명한 우당 이회영 6형제 일가, 강화도 등지에서 망명한 양명학자들과 전국 각지의 망명객들은 1911년 4월 노천 군중대회를 열고 한인 자치 조직인 경학사(經學社)를 만들고, 신흥무관학교를 만들었다. 신흥무관학교는 군사교육 못지 않게 국사교육에 집중했는데, 국사교과서는 이상룡이 지은 ??대동역사(大東歷史)??였다. 『대동역사』는 전해지지 않지만 이상룡이 『서사록』에 쓴 역사이야기를 보면 그 내용을 짐작할 수 있다. 놀라운 점은 1911년에 쓴 글에 이미 조선총독부가 역사왜곡에 나설 것을 미리 알고 있었다는 듯이 그 주요 논리를 논파한다는 점이다. 나는 이상룡의 『서사록』을 볼 때마다 ‘지식인의 예언자적 기능과 소명’에 대해서 감탄을 금치 못한다.

*한사군은 모두 요동에 있었다.

이상룡은 기자를 한반도로 끌어들인 유학자들의 사대주의 역사관을 강하게 비판한다.
「대개 단군의 혈통은 북부여·동부여·졸본부여로부터 연면히 이어져 3천년 동안 끊어지지 않았다. 한 침상 위인데 다시 어디에 기씨(箕氏:기자)가 코를 골며 잠잘 곳이 있었겠는가?(「서사록」, 1911년 2월 24일)」
매국사학은 기자조선의 도읍지 자리에, 위만조선의 도읍지가 섰고, 그 자리에 낙랑군이 섰고, 그 자리가 지금의 평양이라고 아무런 사료적 근거 없이 일방적으로 주장하지만 이상룡은 기자는 한반도에 온 적이 없다고 각종 사료를 가지고 갈파했다. 이상룡은 또 안화진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다.
「한사군의 옛터는 모두 요동에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안화진에게 답하다(答安和鎭)」, 『석주유고』 권3)」
한사군은 모두 한반도가 아니라 고대 요동에 있었다는 것이다. 물론 중국의 각종 사료를 섭렵한 결과 얻은 결론이다.

*한손에는 붓, 한손에는 총

석주 이상룡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낸 만주 무장독립전쟁 계열의 대부였다. 한 손에는 붓을, 한 손에는 총을 들고 일제와 전면에서 싸웠다. 이상룡은 망명 전인 1909년에 쓴 「대한협회 회관에 써서 게시함」이란 글에서 “우리 협회는 의당 각자 그 향리(鄕里)를 정돈하여 지방자치제도의 기초를 만들어야 할 것이다.”라고 주장했던 민주주의 사상가였다. 석주 이상룡의 이런 정신은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이어져 민주공화제의 뿌리가 되었다. 이상룡은 우당 이회영 선생이 대련에서 일제에 고문사하던 1932년 길림성 서란(舒蘭)현에서 병사하는데, “나라를 되찾기 전에는 내 시신을 국내로 안장하지 말라”는 비장한 유언을 남겼다. 

아직도 ‘낙랑군 평양설’ 따위를 정설, 통설 따위로 숭배하고, 이를 비판하는 역사학자들을 ‘사이비, 유사’ 등의 말로 매도하는 매국사학자들과 「한겨레 21」, 「역사비평」 따위의 조선총독부 기관지들의 행태에 대해서도 미리 알았다는 듯이 이런 말을 남겼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당초 사가의 견식이 없어 망령되어 노예의 근성으로 꾸며 찬술하는 솜씨를 남용하여 국가의 체통이 손상될 것을 생각지 않고 오직 타인을 숭배하는 데만 힘썼다.(「서사록」, 1911년 2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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