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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2017년 6월 20일 - 세키노가 북경에서 산 낙랑유물들 등록일 2017.09.27 18:53
글쓴이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조회 1601
이른바 강단사학계가 믿는 마지막 보루는 고고학이다. ‘한사군=한반도설’이 중국 고대 문헌사료에 의해 모두 부정되자 믿을 곳은 ‘말없는 고고학 밖에 없다’는 생각에서 일제히 고고학으로 도망간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이른바 강단사학계의 태두 이병도 박사가 1976년 『한국학보』에 실린 대담에서 자신의 후예들이 고고학으로 도망갈 줄 알았다는 듯이 이렇게 말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우리 사학도로서 주의해야 할 것은 문헌을 주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먼저 고고학 자료를 가지고 말하고 그 다음 문헌적 자료를 말하는데, 이건 주객이 전도된 것 같아요. 고고학은 하나의 보조과학이니까 참고로 해야 하는 것이지 먼저 고고학을 가지고 덤벼서는 안 된단 말예요(진단학회, 『역사가의 유향』, 일조각, 1991년, 239~240쪽)”
이때 이병도 박사가 이런 말을 한 것은 이유가 있다. 1964년 고고학자 김원룡 교수가 풍납토성을 시굴 조사한 결과 풍납토성이 1세기 때 초축(初築:처음 축조됨)되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조선총독부에서 만든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이 고고학 발굴 결과 부정된 것이다. 그 후 이병도 박사를 추종하는 문헌사학자들이 벌떼 같이 일어나서 공격하자 김원룡 교수는 자신의 발굴결과를 부인하고 말았다. 이는 이른바 강단사학계가 학자집단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해주는 하나의 사례이다. 이에 대해서는 고대사연구가인 황순종 선생이 『식민사관의 감춰진 맨얼굴(2015, 만권당)』에서 낱낱이 밝혔으므로 참고하기 바란다. 

현재 강단사학계가 도망간 고고학은 ‘제국주의 고고학’이란 용어에 완벽하게 부합되는 행위이다. 이들이 구세주로 삼는 고고학자는 세키노 타다시(關野貞)와 이마니시 류(今西龍)인데, 세키노 타다시는 도쿄공대에서 조가학(造家學:건축학)을 전공하고 1901년 도쿄제대 조교수로 임명되었다. 세키노는 1902년에 한국을 방문했고, 1906년에는 통감부의 초청으로 다시 방한해 서울과 신의주를 잇는 경의선 철도 부설 현장인 평안도, 황해도 지역을 광범위하게 조사했다. 훗날 세키노 타다시가 우연히 발견했다는 “한사군의 유물”은 대부분 이 지역에서 나타난다. 세키노는 1909년의 2차 조사 때 평양 대동강 유역의 석암리를 발굴했지만 이때만 해도 낙랑유물이라고 특정하지는 못했다. 
최근 문성재 박사는 『한사군은 중국에 있었다(2016, 우리역사연구재단)』에서 세키노 타다시 일기를 공개했는데, 흥미로운 내용이 많다. 세키노가 1918년 북경의 골동품 상가인 유리창가를 돌아다니면서 한나라 및 낙랑 유물들을 미친 듯이 사들여 조선총독부로 보냈다는 내용이다.

①“대정 7년(1918년) 3월 20일 맑음 북경…유리창의 골동품점을 둘러보고, 조선총독부 박물관을 위하여(朝鮮總督府博物館ノ爲メ) 한대(漢代)의 발굴품을 300여 엔에 구입함.”
②“대정 7년 3월 22일 맑음: 오전에 죽촌 씨와 유리창에 가서 골동품을 삼, 유리창의 골동품점에는 비교적 한대의 발굴물이 많고, 낙랑 출토류품은 대체로 모두 잘 갖춰져 있기에, 내가 적극적으로 그것들을 수집함(漢代ノ發掘物多ク, 樂浪出土類品ハ大抵皆在,リ 余極力蒐集ス)

세키노는 한대(漢代)뿐만 아니라 낙랑(樂浪) 출토품도 “적극적으로 수집했다”고 일기에 적었다. 3월 20일은 300원(지금의 1500만원)어치를 샀다고 했는데, 22일에는 얼마치를 샀다고는 하지 않고 ‘한대 및 낙랑 출토품’을 ‘적극적으로’ 사들였다고 썼다. 세키노가 총독부 돈으로 북경의 골동품 상가를 돌아다니면서 미친 듯이 사들여 총독부로 보낸 그 유물들은 어디로 갔을까? 그 유물들이 ‘낙랑=평양설’을 조작하는데 쓰였을 것이라는 사실은 초등학생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이른바 강단사학자들은 ‘낙랑=평양설’은 100년 전 조선총독부 시절에 논증이 끝난 ‘정설, 통설’이라고 주장한다. 그 100년 전 세키노 타다시는 ‘어디 한대(漢代) 및 낙랑 유물 없나?’라고 눈을 부라리며 북경 유리창가를 배회했다. 그리고 지금껏 그를 추앙하는 한국인 후예들은 세키노가 북경의 유리창가를 배회하던 그 심정으로 이 땅을 배회하고 있다. 한국사의 강역과 시간을 축소하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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