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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2017년 7월 20일 - 낙랑군이 평양에서 요동으로 이사했다고? 등록일 2017.09.27 20:06
글쓴이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조회 995
-매국 갱단사학의 딜레마

일제강점기로부터 따지면 107년, 해방 후부터 따지면 72년 만에 매국 갱단사학이 큰 위기를 맞이했다. 그 전에도 위기는 몇 번 있었지만 한국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막강한 친일카르텔로 극복해왔다. 그런데 지금은 다르다. 자신들과 한 몸인 조선총독부 기레기들을 총동원해서 조선총독부 역사관을 비판하는 학자들을 ‘사이비·유사역사학’으로 매도했지만 이 역시 한국 사회의 좌우 친일카르텔의 실체만 드러낸 채 무위로 돌아갔다. 이제는 콘텐츠만 있으면 개인이 SNS를 통해 스스로 언론이 되는 사회다. 갱단과 언론카르텔에 맞서 얼마든지 ‘팩트’에 기반한 ‘진실’을 대중과 공유할 수 있는 시대라는 뜻이다. 고증이 실종된 한국 실증사학과 팩트가 실종된 기레기들의 카르텔이 그리 큰 힘을 발휘할 수 없는 근본원인이 여기에 있다. 시대의 변화를 가장 먼저 감지해야 할 기자들은 아직도 20세기, 심지어 19세기에 산다. 한국 언론이 힘을 상실한 근본 이유가 여기에 있다.

-매국 갱단의 퇴로, 교치설

사실 매국 갱단사학이 퇴로를 모색한지는 꽤 되었다. 그들이라고 ‘낙랑군=평양설’이 아무런 사료적 근거가 없는 3류 코미디 대본 수준이라는 것을 모르지는 않기 때문이다. 특히 한·중 수교 이후 내몽골과 하북성 일대에서 쏟아진 고조선 유물들을 한국인들도 확인할 수 있는 상황을 무작정 외면할 수도 없었다. 게다가 과거에는 자신들만 볼 수 있던 『사기』·『한서』·『후한서』·『삼국지』 등 1차사료를 인터넷을 통해 누구나 검색할 수 있게 된 것도 근본적인 변화다. 이제는 한문만 해득할 줄 알면 누구나 1차사료가 어떻게 쓰여 있는지 확인할 수 있는 시대다. 그래서 ‘낙랑군=평양설’을 신봉하는 매국 갱단사학이 도주한 이론이 ‘낙랑군 이동설’, 즉 이른바 ‘교군(僑郡)’ 또는 ‘교치(僑置)설’이다. 이 주장은 간단하게 말해서 400년 이상 평양에 있던 낙랑군이 서기 313년에 요동으로 이사했다는 논리다. 서울대학교 명예교수 노태돈은, “313년 평양의 낙랑군이 소멸된 후, 낙랑·대방군 등은 요서 지방에 이치되었다(『단군과 고조선사』, 사계절, 2010 )”라고 주장했다. 평양일대에 있던 낙랑·대방군이 313년 요서지역으로 집단 이사했다는 것이다.

-교치설의 뿌리, 조선총독부

그런데 평양에 있던 낙랑군이 요서지역으로 집단 이주했다는 이 희한한 주장도 그 뿌리를 찾아보면 역시 조선총독부다. 조선총독부에서 편찬한 『조선반도사』에서 이마니시 류가 이미 100여년 전에 주장한 내용의 반복이다.  
「건흥(建興) 원년(313) (요동사람 장통이)그 땅(낙랑·대방)을 버리고 그 백성 천여 가(家)를 이끌고 모용씨에게 귀속하여 요동으로 이주하였다. 이후 지리적 호칭으로서 낙랑·대방이라는 이름은 조선 반도에 남았고, 요동에는 두 군의 교치(僑治)가 있어 정치적 호칭은 남았으나 조선 반도에서 한(漢)나라 군현이라는 그림자는 이로써 완전히 사라졌다. 실로 사군(四郡)을 설치한 지 422년이 흐른 후였다(조선반도사 편찬위원회, 『조선반도사』)
이마니시 류는 한반도 북부의 낙랑·대방군을 지배하고 있던 장통(張統)이 고구려 미천왕에게서 패하자 1천여 가를 거느리고 요동의 모용씨에게 투항했다고 주장했다. 군 전체가 이사를 다닌다는 희한한 발상인데, 이 희한한 발상이 21세기 매국 갱단사학의 구원투수로 떠올랐다. 그러면 이마니시 류는 무슨 근거로 이런 주장을 펼쳤을까?

-요동사람 장통 이야기

송나라 때 사마광(司馬光:1019~1086)이 편찬한 『자치통감』에 요동사람 장통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요동사람 장통이 낙랑, 대방 2군을 근거로 고구려 을불리(미천왕)와 서로 공격했는데, 해를 계속해도 해결하지 못했다. 낙랑사람 왕준(王遵)이 장통을 설득해서 그 백성 1천여 가를 거느리고 모용외에게 귀부하자 모용외가 낙랑군을 설치하고, 장통을 낙랑태수로 삼았다.(『자치통감』 권 88)
요동사람 장통이 고구려 미천왕에게 패하자 낙랑사람1천여 가를 데리고 요동의 모용외에게 가서 투항하자 모용외가 낙랑군을 설치해주었다는 이야기다. 먼저 모용외(慕容廆)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모용씨는 한족(漢族)이 아니라 북방 유목민족인 선비족이다. 모용외의 아들 모용황(皝)은 전연(前燕)의 개국군주가 되지만 모용외 자신은 끝내 왕이 되지 못하고 동진(東晋)으로부터 ‘요동공(遼東公)’에 봉해진 인물이다. 5호16국 중의 하나였던 전연의 모용황 때 낙랑군이 있었다는 기록도 없지만 설사 있었다고 하더라도 한나라에서 설치한 낙랑군을 계승했다고 볼 수도 없다. 민족 자체가 다르다. 그 외에도 말이 안 되는 이야기가 너무 많다.

-낙랑군은 평양에 있었는가?

첫째 위치문제를 보자. ‘요동사람’ 장통이 왜 요동이 아닌 평양과 황해도에서 얼쩡대었겠는가? 평양에서 패한 장통이 평양 남쪽으로 도주했다면 몰라도 북방의 고구려 강역 수천 리를 뚫고 요동의 모용씨에게 갈 수 있겠는가? 고구려 군사는 눈 뜨고 구경만 했겠는가?

둘째 장통이 거느리고 도주한 인구수를 보자. ‘백성 1천여 가(家)’라는 것인데, 가란 민간인을 포함하는 용어이다. 1가(家)를 6명으로 잡으면 6천 명인데, 절반 가량은 여성일 것이고, 남성 3000여 명 중에서 아동과 노인을 빼면 전투력 있는 남성은 기껏해야 천여 명을 크게 상회하지 않을 것이다. 이 숫자의 패잔병들이 자신들보다 더 많은 민간인을 데리고 고구려 강역 수천 리를 뚫고 요동의 모용씨에게 가는 것이 가능한가? 인류역사상 이런 퇴각사례는 존재하지 않았다. 세계 최강대국이었던 미국도 1975년 베트남에서 철수할 때 서로 헬기를 타려고 얼마나 우왕좌왕했는가? 이들의 논리대로라면 미군은 민간인들을 모두 거느리고 월맹군이 두 눈 뜨고 지켜보는 베트남 강역을 유유히 통과해서 태국까지 갔다는 논리다. 이들의 논리면 보트피플 따위는 생겨나지도 않았다.

셋째, 낙랑군의 인구수를 생각해보자. 『한서』 「지리지」는 낙랑군이 6만2812호에 40만6748명이라고 말한다. 6만호가 넘는 숫자 중에 1천호가 도망간 것을 낙랑군 전체가 이주했다고 볼 수 있겠는가? 나머지 6만1800여호에 40만 명은 어디로 갔나? 모든 조선총독부 역사관이 그렇듯이 낙랑군 이동설, 교치설도 한마디로 말 같지도 않은 논리다.

-낙랑군은 처음부터 평양에 없었다.

요동사람 장통이 점거했다는 낙랑·대방은 지금의 평양이나 황해도에 있지 않고, 지금의 하북성 일대에 있었다. 고구려가 이 낙랑·대방을 공격하자 장통은 1천여 명을 거느리고 더 서쪽의 모용외에게 귀부한 것이다. 낙랑군은 한 순간도 평양에 있었던 적이 없었고, 따라서 평양에 있지도 않았던 낙랑군이 이주할 수도 없다. 중국의 어느 사료에도 평양에 낙랑군이 있었다는 기록이 없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 또한 현재 한국의 고고학자들이 존경해 마지않는 세키노 타다시가 평양이 아니라 북경에서 낙랑유물을 마구 사들여 총독부에 보냈다는 사실 자체가 낙랑군은 북경 근처에 있었다는 뜻이다. 이 이야기는 후술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