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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2017년 7월 21일 - 낙랑군의 인구는 왜 급감했나? 등록일 2017.09.27 20:08
글쓴이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조회 1104
-후진적인 동방 민족사회와 중국의 발달된 고급 제도와 문화?

낙랑군의 성격과 위치를 알 수 있는 좋은 사례 중의 하나가 인구의 변천이다. 먼저 한사군의 의의에 대해 이른바 국사학계(?)의 태두이자 얼마 전까지도 살아 계시던 인간 1차사료 이병도 서울대 교수는 이렇게 설명했다.
“한(漢)의 동방 군현(한사군)이 설치된 이후 산만적이고 후진적인 동방 민족사회는 전자(前者:한)의 부절(不絶:끊이지 않는)한 자극과 영향을 입어 정치와 문화에 있어 새로운 반성과 향상에의 한 모멘트를 가지게 되었다……그리하여 당시 중국의 발달된 고급의 제도와 문화-특히 그 우세한 철기문화-는 이들 주변 사회로 하여금 흠앙(欽仰:우러러보고 사모함)의 과녁이 되고, 따라서 중국에 대한 사대사상의 싹을 트게 한 것도 속일 수 없는 사실이었다.(이병도, 『한국고대사연구』)”
이병도는 한사군이 한반도 북부에 설치된 것이 ‘후진적인 동방 민족사회’, 즉 우리 한민족의 축복이라고 해석했다. 고대사판 식민지 근대화론이다. 매국 갱단사학이 기를 쓰고 ‘낙랑군=평양설’을 우기는 핵심 사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보통 대한민국 국민들처럼 한나라 식민지인 한사군의 설치를 민족의 재앙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축복으로 보는 것이다. ‘후진적인 동방 민족사회’에 한사군은 ‘흠앙의 과녁’으로서 고급 제도와 문화를 가져다주었기에 북한지역에 있어야 하는 것이다.

-줄어들기만 하는 낙랑군 인구

이병도나 매국 갱단사학의 주장대로 한사군이 흠앙의 과녁이었다면, 그 중심인 낙랑군의 인구는 급속하게 증가했어야 한다. 과연 그랬을까? 한나라는 전한(前漢:서기전 202~서기 8)과 후한(後漢:서기 23~220)으로 나뉘는데, 전한의 역사를 담은 『한서』 「지리지」는 낙랑군의 인구를 6만2812호에 40만6748명이라고 말하고 있다. 후한의 역사서인 『후한서』 「군국지」는 6만1492호에, 25만7050명이라고 말하고 있다. 호수는 큰 차이가 없는데, 인구는 절반가량으로 줄었다. 전쟁이나 전염병 같은 요인들이 있을 경우 인구가 급감한다. 후한 다음에는 위·촉·오의 삼국시대(서기 220~280)가 열리고, 삼국시대는 위나라에서 나온 사마(司馬)씨가 진(晋:서진 265~316, 동진 317~420)을 세움으로써 끝난다. 진나라의 역사서인 『진서(晋書)』 「지리지」는 낙랑군의 호수를 3천7백호라고 전하고 있다. 한 호당 6명 정도씩 잡으면 2만2천여 명 정도로 전한 때의 1/20로 급감했다. 후진적인 우리 동방민족의 흠앙의 과녁이 된 낙랑군의 인구는 왜 후진 지역처럼 줄어들기만 한 것일까?

-1만8천호로 북경에서부터 평양까지 지배?

『진서』 「지리지」는 평주 소속의 5군 중에 낙랑군이 있었다고 말한다. 즉 낙랑·현도·대방·창려군과 요동국인데 그 전체 호수가 1만8100호밖에 안 된다. 한 호당 6명씩 잡으면 모두 10만8천명 정도 된다. 그런데 이 소수 인구로 북경 부근부터 한반도 북부까지 다스렸다는 것이 중국 동북공정과 한국 매국 갱단사학의 논리다. 중국의 「중국역사지도집」은 진(晋)나라의 낙랑군과 대방군이 한강 이북 거의 전체를 지배하고 있는 것으로 그렸고, 대한민국 국고 47억을 들인 「동북아역사지도」 역시 이 논리를 추종해 조조의 위나라가 경기도까지 지배했다고 그려놨다. 그런데 이때의 인구 10만8천여 명 중에서 여성을 빼면 5만4천여 명 정도가 남는다. 이중 아동과 노인을 빼면 많아야 노동력 있는 남성 장정들은 2만여 명 정도가 될 것이다. 이 2만여 명이 광대한 지역의 행정일도 보고, 농사도 지어서 세금도 내고 가족들을 부양하면서 북경 부근에서 한강 이북까지 수천 km에 달하는 만리장성도 지켰다는 주장이다. 지금 요녕성(遼寧省)의 인구는 4천4백만, 하북성(河北省)은 7천3백만으로 모두 1억2천만 명 가량이고, 여기에 북한 인구 2천5백만 정도를 추가하면 1억5천만 명 이상이 거주하는 이 광대한 지역을 10만8천여 명 정도의 인구로, 그것도 2만여 명 정도의 장정으로 농사 지어 세금도 내고 가족도 먹여 살리면서 만리장성을 지키는 것이 가능하겠는가?

-고구려 서쪽의 요동군과 낙랑군

매국 갱단사학에서 한나라 요동군 서안평이라고 사료 없이 우기는 곳은 압록강 대안의 단동이다. 그러나 『요사』 「지리지」는 지금의 내몽골 파림좌기가 요동군 서안평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고구려는 서기 146년 태조대왕이 요동 서안평을 공격해서 대방령을 죽이고, 낙랑태수 처자를 인질로 잡아왔다. 물론 압록강 대안 단동이 아니라 내몽골 파림좌기를 공격한 것이다. 고구려는 단군조선의 강역을 되찾는 국시 다물에 따라서 고구려 서쪽에 있던 요동군과 낙랑군 등을 지속적으로 공격했고, 이 때문에 이 지역에 살던 한인(漢人)들은 계속 서쪽으로 도주해서 인구가 급감한 것이다. 후진적인 동방 민족사회가 흠앙의 과녁으로 삼았던 평양의 낙랑군 따위는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고대 식민지배와 근대 식민지배를 모두 우리 민족의 축복으로 여겼던 이른바 국사학계(?)의 태두 이병도의 머릿속 상상이 만든 허구일뿐이고, 이를 계승한 매국 갱단사학의 어거지일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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