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와 혁신으로 꿈을 현실로 만드는 세상!

학술 이야기

  • 한국 바른역사이야기
  • 이덕일의 역사특강

논문 자료

HOME > 학술 이야기 > 이덕일의 역사특강

제목 20170610 - 세키노 타다시와 이른바 평양의 낙랑유물들 등록일 2017.09.19 10:59
글쓴이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조회 1577

한국처럼 고고학이 힘을 쓰는 나라도 없다. 다른 모든 나라는 문헌사학이 위주고 고고학이 보조다. 그러나 한국은 거꾸로 고고학이 문헌사학보다 많은 발언을 한다. 조선총독부 역사관을 하나뿐인 정설로 유지하기 위해서다. 낙랑군의 위치에 대해 중국의 수많은 1차 문헌 사료는 평양이 아니라 지금의 중국 하북성 일대에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앞서 올린 중국 1차 사료로 보는 고조선과 낙랑군의 위치 참조). 이른바 강단사학계는 수많은 문헌 사료를 모른 체하고 말없는 고고학으로 도망가서 ‘낙랑군은 평양에 있었다’고 우긴다. 뉴욕과 LA에 코리아타운이 있으니까 지금 미국은 한국의 식민지라고 주장하는 격이다. 

물론 이 과정에서도 거짓말이 난무한다. 조선총독부는 일제강점기 평양 부근에서 70여기의 고분을 발굴하고 낙랑군 유적이라고 발표했다. 그런데 해방 후 북한은 2600기의 무덤을 발굴하고 이 고분들은 낙랑군(郡)이 아니라 《삼국사기》에 나오는 낙랑공주와 호동왕자의 낙랑군(國)의 유적이라고 발표했다. 이에 대해 남한 강단사학계는 “평양 일대 무덤들은 낙랑군 유적이 분명하다.”라고 우긴다. 북한에서 낙랑국 유적이라고 발표한 것을 왜 낙랑군 유적으로 보는지에 대한 논증은 ‘당연히’ 없다. 그냥 우기는 것이다. 이런 남한 강단사학계가 크게 숭상하는 인물이 조선총독부의 의뢰로 많은 발굴을 했던 도쿄공대 교수 세키노 타다시(關野貞:1868~1935)다.


“낙랑군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와 함께 구체적인 역사상이 정립된 것은 일제강점기 이후의 일인데, 여기에는 고고학 발굴 조사 자료들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낙랑고분 발굴 조사는 1909년 도쿄제국대학 건축학과 세키노 다다시에 의해 개시되었다.”(오영찬, 『낙랑군 연구』, 사계절, 2006년, 16쪽)


낙랑군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는 강단사학자 오영찬의 말처럼 낙랑군을 구체화시킨 것은 조선총독부이고 세키노 타다시가 주도했다. 최근 한때는 진보를 자처했던 『역사비평』에 조선총독부 역사관이 맞다는 논문들을 게재해 『조선일보』로부터 ‘국사학계의 무서운 아이들’이란 큰 칭찬을 듣고 고무된 위가야도 『한국 고대사와 사이비역사학(역사비평사)』에서 세키노 타다시의 발굴에 대해서, “이후 1920년대 중후반에 이르기까지의 (세키노의) 조사를 통해 확인된 유적과 유물들은 낙랑군의 중심지가 평양이었음을 확인시켜주는 핵심적인 증거로 인정받았다(124쪽)”라고 세키노 타다시가 21세기 한국 국사학계의 ‘무서운 아이들’의 정신적 스승임을 고백했다. 


그런데 세키노 타다시는 이른바 신의 손이다. 가는 곳마다 한사군 유물과 낙랑군 유물을 발견하는 기적을 연출했다. 그런데 그는 보고서에서 이 모든 유물들을 ‘우연히’ 발견했다라고 써놓았다. 효문묘 동종도 ‘우연히’, 저것도 ‘우연히’……, 낙랑군 설치 후 2천년 동안 꼭꼭 숨어 있던 유물들이 세키노가 나타나면 스스로 발이 달려서 달려왔다. 그런데 세키노 타다시는 ‘우연’이 필연이었음을 자신의 『일기』에 남겼다. 문성재 박사가 작년 『한사군은 중국에 있었다(우리역사연구재단, 2016년)』라는 저서에서 이 일기의 일부를 공개했다.


“(북경) 유리창가의 골동품점을 둘러보고, 조선총독부 박물관을 위하여 한대(漢代)의 발굴품을 300여 엔에 구입함”(『세키노 타다시 일기〔關野貞日記〕』, 대정(大正) 7년(1918))


북경의 유리창가는 조선시대부터 유명한 골동품 거리로서 조선 사신들의 일기에도 여러 번 등장한다. 평양 지역이 낙랑군이었다고 고고학적으로 확립시켰다는 세키노 타다시는 북경 유리창가를 미친 듯이 돌아다니면서 ‘조선총독부 박물관’을 위해서 한나라 때 유물들을 미친 듯이 사들였다. 문성재 박사는 당시 300엔은 약1,500만원 정도 되는 거금인데, 당시 중국에서는 유물에 대한 가치가 그리 높지 않았기 때문에 수많은 한나라 유물을 사들일 수 있는 돈이었다. 


지금 조선총독부가 발굴했다는 여러 낙랑 유물들 중에서 ‘북경 유리창가에서 사왔다’고 설명하고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 유물들은 어디로 갔을까? 세키노 타다시가 대부분의 유물을 ‘우연히’ 발견했다고 덧붙이고 『일기』를 남긴 것은 그나마 조금은 학자적 양심과 최소한의 인간으로서 자존심은 남아 있다는 고백일까? 세키노 타다시가 북경 유리창가에서 사온 한나라 유물들이 낙랑군 유물로 둔감했을 개연성을 밝혔음에도 이땅의 이른바 강단사학자들은 아직도 “조선총독부의 발굴 결과 낙랑군은 평양에 있었음이 입증되었다”라고 우기고 있다. 그런데 이런 조선총독부의 관점이 해방 72년이 넘은 대한민국의 유일한 정설, 통설이라면서 이에 비판적 인식을 갖고 있으면 고위공직자가 될 수 없다고 우기고 있으니 과연 해방이 되긴 된 것일까? 더구나 단재 신채호 선생을 끝없이 모독하고 있으니 일제에 빼앗긴 나라를 되찾다가 총독부에 사형당하신 수많은 순국선열들이 관에서 벌떡 일어나 달려오실 일이 아닐 수 없다.